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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Apr 18. 2016

'다름'의 사랑과 '같음'의 이별

사랑할 수 없는 남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아노말리사> 후기 제1편

봐야만 할 것 같은 포스터


과연 우리가 이 스톱모션 인형들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관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 영화가 시작하기 5분 전 정도까지 <아노말리사>가 애니메이션 영화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스톱모션 영화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포스터라든가 스냅샷을 확대해서 보지 않았어서 그런지, 인물들이 스톱모션으로 촬영된 인형이라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고, 특히나 애니메이션 포스터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포스터도 한몫했다. 단지 언제부턴가, '반드시 봐야만 하는 영화'라는 텍스트와 몽롱해 보이는 이미지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아노말리사는 꼭 봐야 해'라고 벼르게 됐을 뿐이다.

이 스냅샷을 작게 보고, 아무 의심없이 실사 영화인 줄만 알았다.

그러다 영화관에 앉고 나서야 정작 이 영화에 누가 나오는지 어느 나라 영화인지 뭐 하나 아는 것 없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영화를 검색하게 시작했다. 그런데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던 것은 이 영화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뿐만은 아니었다.

여자 주인공 성우 1명, 남자 주인공 성우 1명,
 그리고 '목소리' 역의 나머지 1명 총 3명의 주연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캐스팅인지,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또 동시에 굉장히 흥미로웠다. '목소리'역이라니. 인물은 여주 남주 한 명씩만 나오고 신성한 계시를 내리는 목소리라는 역할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소리 역의 성우가 모든 조연 목소리를 다 맡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실수를 해서 조연 성우들은 아예 입력조차 안해준 건지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오히려 영화 시작 직전에 이런 사실을 알아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는 위안이 된다.)


찰리 카우프만(좌)과 듀크 존슨(우)

내용 외적인 얘기를 먼저 하자면, 감독 두 명 중, 찰리 카우프만은 우리가 익히 들어 익숙한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와 <이터널 선샤인>을 쓴 작가이다. 개인적으로 <이터널 선샤인>을 굉장히 좋아했고 최근 재개봉 때까지 챙겨봤었는데, <이터널 선샤인>에 이어 <아노말리사>를 보고 나니 이 작가(혹은 감독)의 작품 느낌이 파악이 된다. <존 말코비치 되기>도 꼭 봐야겠다는 다짐이 서면서도, 만약 보게 된다면 거의 매의 눈으로 단서와 숨은 의미를 찾아가며 영화를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이터널 선샤인>이나 <아노말리사> 모두 장면 장면에 담긴 메시지나 숨은 의미들이 많고, 왠지 한 번 봐서는 상큼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계속 생각나 결국 두 번 이상씩 보고 싶어 지는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노말리사>는 찰리가 '프란시스 프레골리'라는 필명으로 쓴 라디오 연극이 시작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연극에 참여한 세 명의 성우가 그대로 이 영화의 성우를 맡았다.

또한, 스톱모션 기법으로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제작 기간은 총 3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11만 8089개의 프레임을 찍었고 1261개의 얼굴, 1000개가 넘는 의상과 소품을 만들어가며 영화를 완성해냈다고 한다. 집슨 파우더라는 3D 프린터를 통해 얼굴들을 제작했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면 얼굴 상단과 하단이 분리되어 있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일부러 분리된 부분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한다. 이마와 하관을 분리함으로써 좀 더 섬세하고 정교한 표정 연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섬세한 표정과 행동에서 나오는 감정, 분위기가 실제 '인간' 배우들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전달력을 보였다. 유튜브에서 다양한 making film들이 있기에 몇 개 보았는데, 생각보다 작은 인형들, 작은 공간들을 하나하나 움직이며 촬영하는 모습에서 제작진들의 땀과 노력에 겸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힘든 작업으로 인해, 인형 제작자와 애니메이터들이 수도 없이 관두는 바람에 제작에 큰 난항이 있었고 투자를 받지 못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킥스타터를 통해 펀딩을 받았다고 하는 흥미로운 뒷얘기가 있다.


 노력들이 모여 만들어진 <아노말리사>는, 그 어떤 실사 영화보다도 더 사실적인 세상을 눈 앞에 그려준다.



#같은 목소리와 같은 얼굴들


다시 영화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영화 안에는 관람객으로서 큰 인상을 받을 법한 요소들이 차고 흘러넘친다. 시작부터 깜깜한 화면을 배경으로  이런저런 대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점점 많은 대사들이 첨가되면서 사운드만 아주 소란스러워진다. 모두 같은 목소리로 말이다. 이때까지는 사실, 이 같은 목소리들이 머릿속의 대사들인지 뭔지 감이 안 온다. 하지만 신시내티에 착륙하면서 이후 진행되는 영상들을 통해 여성이든 남성이든 혹은 어린 아이든 노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 2중주 버전(?)의 라크메를 듣는 마이클

사실 이 부분이 상당히 역겹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클이 좋아하는 여성 2 중창 노래 라크메마저 두 남성의 2 중창으로 들리고(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아내든 아이든 사랑했던 과거의 여자든 모두 다 동일한 목소리로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Everyone else 역(목소리 역)을 맡은 톰 누넌은 인터뷰에서, 일부러 모든 역할에 전혀 차이 없는 목소리로 연기했다고 말한다. 목소리가 역할마다 조금이라도 달라질 경우, Everyone else의 모두 같은 목소리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마이클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과 나중에 하룻밤 사랑에 빠지는 '리사' 그리고 심지어 인간조차 아닌 게이샤 인형을 제외하고 모든 인물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동일하다.


하나같은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얼굴조차도 하나같다.


마이클에게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머리 스타일이나 옷 스타일일 뿐이다. 이러한 덕분에, 자신이 과거에 사랑에 빠졌었던 벨라에게 고심 끝에 전화를 한 끝에도, 벨라가 전화를 받은 이후 '벨라를 바꿔달라'라는 이해할 수 없는 요청을 한다든가, 벨라와 만나기로 한 이후 '매우 보고 싶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벨라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바에 여성이 들어올 때마다 벨라인지 아닌지를 구별해내지 못한다.


바로 인간이 타인을 인식하는 가장 큰 요소가 '얼굴'과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각자의 독특한 피부 질감 및 온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식은 '외적인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며 함께 맛있는 것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이라는 인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경험과 감정을 구성해가며 그 사람의 외적인 특성보다 내적인 매력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비로소 상대방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같은 외모나 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어느 정도 구분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최소한의 관심과 대화만으로도 말이다.


하지만 마이클이 다른 이들에게 던지는 시선과 말마디들은, 그 최소한의 기준조차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결핍되어 있다.


이러한 점 비추어보면, 착륙을 하는 도중에 자꾸 말을 거는 옆 사람, 귀찮게 말을 걸어대는 택시 기사, 자신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호텔 프런트, 엄청난 팬인 듯 자꾸 말을 거는 호텔 직원, 서로 시원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싸우는 신혼부부, 모두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 마이클에게 집착이 있는 듯한 태도, 마이클을 귀찮게 하는 말과 행동들, 그리고 그들의 '하나같은 얼굴과 목소리들'. 또 중요한 한 가지, 마이클이 그들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관심의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마이클은 모든 이들을 '하나같이 지루한 인간들'로 치부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는 제삼자 관객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개성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비행기에서 아내와 항상 옆자리에 앉고는 해서 착륙할 때 실수로 마이클의 손을 잡았다는 겁 많은 옆 자리 승객이 보인다.

신시내티라는 도시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특히 칠리와 동물원) 마이클이 흥얼거리는 라크메만 듣고도 영국 항공사의 boarding song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짬밥이 있으며 자기 할 말만 하기 좋아하는 택시 기사가 보인다.


단지 마이클 만이, 그들에게 강제로 똑같은 가면과 똑같은 목소리를 덮어씌워 놓고 그 이면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토록 무관심의 시선 아래
모든 이들은 같은 얼굴과 같은 목소리를 부여받게 된다.


아주 재미있는 점은, 마이클을 놀리기라도 하듯, 마이클이 묵는 호텔의 이름은 '프레골리 호텔'이라는 점이다. 감독들도 밝혔듯이 이 스토리는 프레골리 딜루젼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 증후군은 유명한 변장 배우의 이름을 따서 생긴 심리적 증후군으로, 여러 사람이 실제로는 동일인이며 끊임없이 변장을 하거나 외모를 바꿀 뿐이라고 단정하는 심리 현상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믿는다'라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한 명의 인간이기 때문'이지, '내가 각자의 개성들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인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개성을 갖추지 않은 그들에게 있다.


하나의 단면으로, 그토록 고민하다 만난 벨라에게 마이클은 계속해서 묻는다. 혹시 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냐고. 어떻게 가 변한 거냐고. 결국 마이클은 11년 전 벨라와의 이별 과정에서, 벨라마저 Everyone else 가 되어가는 걸 보고 그녀를 떠났으며, 그것이 암묵적으로 '벨라의 무언가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   . " 똑같아".  치도        .


또 하나, 이런 마이클의 심적 질병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이 '고객 서비스 자기 계발서'의 작가로 유명세를 얻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심지어 자신의 강연에서조차 '고객들은 각자의 아픔이 있고 개성이 있다. 그런 개성을 찾아내는 것이 고객 서비스다.'라고 강조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된다. 마이클이 실제로 책을 쓴 이후에 이 질병을 겪게 된 것인지, 선천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연을 하는 마이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말 그대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름'으로 시작한 사랑은 결국 '똑같이' 끝난다


결론적으로 마이클에게 이 세상은 '나'와 '모두 동일한 타인들' 둘로만 이루어져 있다.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얼굴들에 파묻힌 세상에서 마이클 자신만이 '아노말'(스페인 어로 예외의, 이상한, 변형적인 이라는 뜻)한 존재다. 그러한 세상에 지루함을 느끼고, 마이클은 자신 외의 예외적인 무언가와 변형된 무언가 즉 '또 다른 아노말'을 암묵적으로 기다리고, 또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조차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다른 이들과 동일한 얼굴로 변해 보이려는 기괴한 순간, 천상의 여신 '아노말리사'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아노말리사는 리사가 나중에 언급하듯 일본어로 천국의 여신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바로 이 때 마이클의 하관이 갑자기 호러 무비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듯한 방식으로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돌아왔다 한다. 버그가 걸린 것처럼.

이 때서야 왠지 나의 불안한 정서에 숨 돌릴 곳이 생긴다. 드디어 여자 목소리가 등장한 것이다. 여자 얼굴로부터 남자 목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에 적응하기는 30~40분 남짓한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기에, 처음 등장한 여자 목소리에 드디어 알수없는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이클 역시 수없이 많은 '동일한 목소리'에 오랜 기간 피로감을 느껴온 마이클인지라, 방 밖에서 들려온 찰나의 그 목소리에 급히 옷을 주워 입고 무작정 같은 층의 방문들을 두들기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는다.



그리고 열린 어느 한 방문에서 드디어 '리사'가 등장한다. 다른 이들과 동일하지 않은 얼굴과 동일하지 않은 목소리를 가진 리사에게 마이클은 한 눈에 매료된다. 그녀와 같이 방에 머무르는 에밀리보다도 덜 인기 있고, 연애를 한 지 8년이나 지난 노처녀이며, 만년 팀장에, 딱히 좋지 않은 몸매를 가졌으며, 얼굴에 큰 흉터가 있어 전화 상담원밖에 할 일이 없었던 자존감 낮은 리사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색다른 목소리와 색다른 얼굴로 인해,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조차 똑같이 들리는 마이클로서는 리사에게 외도의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장면이었다.


마이클에게 '개성'이란 '아름다움'과 동일한 의미를 가질 만큼이나 간절한 것이었을 테니.


그리고 마이클은 리사와 에밀리에게 바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하고, 리사와의 사랑스러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엔딩 OST  'None of them are you'

우선, 아노말리사(리사)가 이 영화에서 가지는 중대한 역할과 의미, 특히 마이클이 리사를 발견한 것의 의미와 리사가 마이클에게 발견된 것의 의미를 더 살펴봐야 한다. 둘은 비슷한 듯 엄연히 다르다. 마이클이 보는 세상은 '나 빼고 다 지루하고 똑같은 이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중에 하나 예외로 등장한 리사는 자신 외에 또 다른 유일한 아노말이다. 리사는 자신과 같은 종류 사람이고, 추후에 마이클의 악몽에서도 나오듯 마이클은 리사와 자신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한다. 홀로 '특별한 자, 사랑받는 자'의 반열에 올라있던 마이클이 리사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 이유는 거의 확실하게, 리사가 가진 '다름'때문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리사에게 '아노 말리사'라는 아름다운 작위를 내린다.


이러한 다름에 대한 관심 덕분인지, 마이클은 영화 시작 후 처음으로 리사라는 타인의 개성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리사는 구금을 좋아하고, 바에서 흘러나오던 이 영화의 엔딩OST를 좋아하고, (이런 것도 이 영화의 재치 있는 면이다) 버튼 누르기를 좋아하고, 신디 로퍼와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발견해낸다. 심지어 리사에게 신디 로퍼의 노래를 직접 불러달라고까지 요청하고 결국은 이 영화가 19금이 된 핵심적 원인인 장면까지 이어진다.


반면에 리사는, 스스로 뭐 하나 특별할 것 없고 예쁘지도 않다고 생각하며 자존감없이 지내온 노처녀이다. 특히 마이클의 빅 팬이었던 그녀였던지라, 우연히 같은 층에 머물고 있던 마이클이 방문을 두들기며 자신을 찾아온 점이라든가 함께 술을 먹자고 하는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초대까지 하는 마이클과의 만남 자체가 리사에게는 엄청난 행복이고 행운이다. 그렇게, 오히려 자신을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던 리사는, 마이클이라는 인물이 눌러준 자신조차 모르던 매력적인 '버튼'들로 인해 스스로를 새로이 발견한다.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를 부르는 리사. 아주 아름답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마이클이 '동일화의 악몽'(아주 흥미로운 장면이라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룬다)을 꾸고 일어난 후, 환상적인 사랑은 다시 늪에 빠져버린다. 리사의 매력이었던 개성들은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귀찮음이 되고, 리사의 목소리와 얼굴마저 다른 사람들의 그것으로 변해간다. 그녀와의 아침 식사 시간마저 짜증 나는 요소들로 가득했고, 결국 마이클의 사랑은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저 멀리 사라져버린다.


'다름'으로 시작된 사랑은 결국 '똑같이' 끝나버린다.


프레골리 증후군인 마이클은 결국, 자신을 지루하게 만드는 그 똑같은 얼굴과 그 똑같은 목소리를, 사랑했던 리사에게 씌워버리고 자신의 사랑을 마감한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야?


사실 그냥 이렇게 마이클의 비극적인 질병과 사랑을 비추고 우중충하게 끝일 줄만 알았는데, 작은 반전이 있었다. 마이클의 시선에서 떠나, 삶에 대한 희망과 행복을 찾은 리사가 자신의 시선에서 마이클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객관적인 시선(제삼자의 시선)인지 리사의 시선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영화의 99퍼센트를 이끌었던 메스꺼운 얼굴들과 목소리들과 암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감독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살짝 보여준다. 밝은 햇빛 아래 리사의 옆자리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에밀리는, 마이클의 시선에 비치던 개성 없는 얼굴이 아닌 매력적이고 이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리사는 여전히 자신의 맑은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다. (아래는 에밀리의 before after)


결국, 모든 것은 타인의 개성을 볼 수 없는 마이클의 내면이 원인이었다. 마이클이 지루해하던 세상과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한 사람이고 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일종의 망상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일궈낸 '동일화'는 그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세계'에 가둬버린 것이다. 반면에, 스스로를 일반화하고 보잘것없이 생각하며 오랜 기간 사랑받지 않았던 리사는 스스로의 삶에 희망을 부여하며 '사랑할 수 있는 세계'로 힘차게 날아오른.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마이클은 자신을 위해 서프라이즈를 해주는 친척들을 보며 더 큰 혼란에 빠진다.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친척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고 미소를 짓고 있는 상황에 어지러워진다. 그리고 마이클은 자신의 아내 도나에게 도대체 저들은 누구냐며 소름 끼치듯이 물어본다. 도나는 자꾸만 이상한 질문을 하며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마이클에게 당황하며 되묻는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야?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영화볼때는 몰랐는데 스냅샷을 보니 진짜 무섭다.....


어쩌면 마이클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집착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사람들의 개성과 아픔과 이야기에 시선을 주지 못하는 마이클의 결핍으로 인해, 되려 다른 사람들을 동일화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마이클이 리사에게 희망찬 삶을 선물할 몇 가지 버튼들을 눌렀던 것처럼, 그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고 사랑할 수 있는 그 어떤 버튼도 자신에게서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마이클은 다른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라는 외적인 개성들을 파괴하면서 다 같은 '한 명'으로 취급하고 '지루한 사람들'로 뭉퉁그려버린다. 그래야만 자신과 다른 이들과의 '다름'이 자연스레 벌어지고 나를 구분해낼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방식의 '도망'은 마이클의 삶을 파괴해갔다. 더 이상 마이클은 사랑할 수 없고, 어쩌면 사랑받을 자격조차 잃어버렸다. 심지어 자신의 얼굴조차 그들과 하나가 될 것만 같은 공포스러운 모습을 거울 속에서 보았으니 말이다. 바로 그때 프레골리 호텔에서는 리사의 목소리가 그를 구해주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다.


마이클도 우리도, 배워야 한다. 얼굴과 목소리와 그 외 모든 외적인 것 너머에 있는 무엇을 보는 능력을 말이다. 서로를 경험하고 지켜보고 알아볼 수 있게 되는 바로 그때, 비로소 나는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 도나가 '누구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 말의 의미는, '답이 없다'라는 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외모와 목소리 같은 외적인 것들로 단정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사랑, 나를 만들어 온 경험들 같은 복잡 미묘한 것들이 바로 '내가 누구다'라는 것을 설명할 뿐이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라는 뜻이지 않을까.            ''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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