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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May 10. 2016

고독사한 이들을 위한 장례식

영혼없는 효율에 대한 조용한 경고, 영화 <스틸 라이프> 후기   

나도 모르게 '장례식은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는 관념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언제 들었는지도 모를,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장례식이 오히려 산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가, 괜히 마음에 남았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나의 여러 번의 장례식 조문 경험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어서일 것이다.


나에게 장례식장은, 언제 가도 참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곳이다. 여러 조문객들이 검은색의 우울한 옷을 입은 채로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는 곳. 한편에는 슬퍼하는 이들이 고인을 기억하고, 또 다른 한편에는 남은 이들이 요즘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곳.  눈물과 웃음,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함께하는 그 장소와 분위기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어렸을 때 처음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갔던 장례식장에서, 왜 사람들이 그다지 울고 있지 않은 건지, 왜 내가 예상한 만큼 슬퍼하고 있지 않은 건지 많이 궁금해했었는데. 지금도 답은 모르겠다. 예전과 똑같이 고개가 갸우뚱해질 뿐이다. 다만 이제는 뭐든지 '그런가 보다'하고 넘길 수 있는 시기가 와서인지 궁금증은 사라지고 여전한 어색함만 남았다.

정말 장례식장은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일까?
그래도 되는 걸까?
Still(사진)을 통해 고인의 삶을 귀추하는 존 메이


영화 주인공 존 메이는 고독사 담당 공무원이다. 고독사 한 이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가족을 찾아주며 사망 처리한다. 이런 직업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생각해보면 없어서는 안 되는 공무원이긴 한 듯 싶다. 1인 가구가 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독고사도 늘어갈 테니.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이유에서든 나쁜 이유에서든 홀로 생을 마감하게 된 이들을 '서류 상으로' 사망 처리하는 일이 바로 이 존 메이와 같은 공무원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고인들에게는 최고의 친구이지만,
공무원으로서는 0점짜리 공무원

그리고 존 메이는 고독사 담당 공무원의 소임을 '과할 정도'로 충실히 다하는 성실한 공무원이다. 고독사 한 이들의 집에 찾아가 고인이 남긴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고 고인의 가족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마치 고독사 한 이의 가장 친했던 친구인 것처럼 모았던 기억의 조각들을 끼워 맞춰 추도문을 작성하고, 생전에 고인이 믿었던 종교와 음악들까지 고려해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준다. 그리고 존 메이는 그들 하나하나를 잊지 않으려는 듯, 고인들의 사진 하나하나를 앨범에 꽂아두고 항상 살핀다. 존 메이는 그들의 마지막 친구이고 가족이었으며 유일한 조문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 배부른 이야기인 걸까. 불과 부서에 온 지 2달째인 그의 상사인 프래챗 부장은,  22년을 공무원으로 근무한 존 메이의 이러한 '느리고 비효율적이며 소비적인' 업무 방식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존 메이를 비웃듯이 고인들의 시신을 빨리빨리 화장 처리하고, 화장한 잿더미들은 한 구덩이에 부어버린다. 몇 달을 끌며 고인들의 가족을 찾으려는 존 메이의 헛된 노력을 비웃고, 존 메이만이 참석하는 고인의 외롭지만 정성스러운 장례식을 비용 문제로 추락시킨다. 그리고 결국 존 메이는 프래챗에 의해 부당하게 해고당하며, '빌리 스토크'의 고독사 사건을 마무리짓는 것으로 그의 공무원 생활을 마감해야만 하는 위기에 빠진다.

고인의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 홀로 장례식에 참석하는 존 메이

프래챗은 존 메이를 비난한다.

"장례식은 산 자들을 위한 것이에요. 죽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상관할 수도 없죠."

하지만 존 메이는 특유의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반박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그렇다. 존 메이는 분명히 국가라는 시스템의 한 부품으로써는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공무원이었다. 가족도 지인도 없는 이들을 위해 단순 화장이 아닌 장례식을 택했고, 수십 명의 고독사 사건을 종결할 시간에 단 한 명의 고인의 가족과 친구들을 찾기 위해 시간을 보냈다. 그의 업무 속도와 결과물을 가지고 점수를 매기자면, 단연코 0점이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존 메이에게 손가락질할 자격도 권리도 없다. 우리는 누구도 존 메이만큼 인간을 사랑하고 영혼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작은 목걸이와 먼지가 쌓인 앨범에서도 고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위하고, 그리워했다. 산 자들에게서는 조롱을 받을 지라도, 말없는 죽은 이들에게는 최고의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결국 존 메이는 부서의 비용 문제와 그의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으로 인해 해고당하고, 부서는 통합된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그들의 삶이 'CASE CLOSED(사건 종결)'이라는 글자 하나로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만큼 가치 없는 것인가? 홀로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해서, 그들의 삶에 닿는 이름 모를 공무원의 손길조차 쓸데없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걸까? 이렇게 영혼조차 없는 고도의 효율성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추구하던 것인가?


영혼 없는 효율성이 세상을 잠식한다

우리는 누구나 혼자가 될 수 있다. 갑자기 사랑하던 사람과 사별할 수도 있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크게 다투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고 나 자신이 쓸모없고 무의미한 인생을 살았다고는 할 수없다. 존 메이의 앨범에 꽂힌 고독사 한 이들의 사진들은, 모두 웃고 있고 행복해 보인다. 그들 역시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음이 끊이지 않는 꿈같은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사진으로 하나의 흔적을 남겼겠지. 아무리 숫자로 측정되는 것들이 점점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삶의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들은 영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삶에 비하면 전혀 의미가 없다. 물론 효율성은 우리의 영혼을 조금 더 편리하고 안락한 공간으로 이끌 수도 있다. 하지만 삶에 깃든 한 사람의 영혼을 살펴보는 일은,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재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 메이가 프래챗 부장으로부터 받았던 비난과 비웃음들은 결국 '영혼 없는 효율성'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프래챗은 존 메이의 상사였고 아마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이다.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기세 등등하게 아우디를 몰고 다니며, 기차를 타고 다니는 존 메이와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다. 영혼 없는 아우디와 영혼 없는 효율성. 프래챗 같은 사람이 돈, 차, 명예와 같은 영혼 없는 것들을 등에 업고 사람들의 작은 삶 하나하나를 짓밟기 시작하면서, 결국 세상은 그렇게 잠식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빌리 스토크의 흔적을 찾아 그의 옛 노숙자 친구들을 만난 존 메이

존 메이는 결국 해고당한다. 프래챗으로부터, 국가로부터, 시스템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영혼이 있고 효율적이지 않은 인물은, 영혼이 없고 효율적이어야 하는 곳에서부터 추방당한다. 하지만 존 메이는, 자신이 담당한 마지막 고독사 사건의 빌리 스토크의 삶과 영혼을 깊게 살펴보며, 그 자신도 모르게 스토크에게 매료된다. 부당한 회사의 처사에 오줌을 갈겼던 스토크처럼, 프래챗의 아우디에 오줌을 갈긴다. 이 장면이야말로 가장 통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영혼 없는 효율성과 무자비한 시스템에 대한, 가장 재치 있는 복수였다. 정적(Still)이었던 존 메이는 빌리 스토크의 영혼을 거꾸로 되짚어가며, 점점 밝고 통쾌하고 산 사람들과도 많은 소통을 하는 인물이 된다.


결국 영혼 없는 효율성은 시스템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묘자리를 봐둔 존 메이

존 메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홀로 땅에 묻으며, 자신의 묏자리도 미리 봐 두었다. 사실 존 메이 자신도, 고독사 할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지인도 가족도 없고, 마치 이 세상에 몰래 놀러 온 사후 세계의 사람처럼,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정갈하고, 빵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으며, 과일을 깎아도 한 번의 끊김 없이 자르는 인물이다. 그에게, 생전에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의 흔적을 모아 치르는 장례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존 메이는 빌리 스토크의 장례식에 더 많은 이들이 올 수 있도록, 그의 삶에 한 오라기라도 관련됐었던 모든 이들을 찾아 스토크의 이야기를 듣고 장례식에 오기를 부탁한다. 그의 이렇게 무조건적인 관심과 노력은, 스토크를 기억 저편에 두고 잊고 지내던 많은 이들을 결국 장례식장까지 끌어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존 메이는 자신의 묏자리로 미리 봐 두었던 곳을 흔쾌히 빌리 스토크에게 내어준다. 무덤 주인이 누구냐는 관리인의 물음에 존 메이는 '그냥 친구죠'라고 답한다.


 존 메이는 '장례식은 산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장례식의 온전한 주인공이 고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을 기억하도록 몸과 마음으로 뛰었다. 그가 고독사 한 이들의 장례식을 그렇게나 정성스럽게 치러준 것은, 장례식의 주인공이었던 그 죽은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고 사랑받는 삶을 살았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소중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살았다는 흔적을 살아있는 이 세계에는 남기지 않았지만, 홀로 죽어간 많은 이들과 진짜 친구의 연을 맺으며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흔적을 남겼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냥 친구'를 위해 영혼을 다했던 존 메이는 영혼 없는 효율성을 거부하고 결국 진짜 '죽은 사람을 위한 장례식'을 치러냈다.


그리고 나는 존 메이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장례식이 산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꼭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며 고인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그동안 장례식장에서 느꼈던 그 어색함은, 내가 슬프거나 눈물이 나지 않아서, 혹은 다른 이들이 웃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한 명의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떠나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도 못했고 그러려는 노력도 딱히 없었음에서 발생한 것이었던 것 같다. 만난 적 한번 없는 외로운 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장례식을 치러줬던 존 메이에 비하면, 나는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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