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시작된 삶. 죽어서 살 것인가, 벗어나 살 것인가.
꽤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갓 아버지가 된 송중기의 노개런티 출연작으로도 화제가 된 '화란'의 개봉일이 마침 출산 휴가 이틀차였다. 큰 기대도 부담도 없이 한적한 극장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관람 제한은 15세였지만, 19금 급의 잔인한 장면들이 꽤 자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나도 모르게 눈을 찔끔 감고 흘려보낸 장면들이 많았다. 또한 사전에 아무 정보 없이 본 영화여서, 생각보다 어둡고 비상업적인 스토리라인에 살짝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100% 만족스러운 재미있는 영화였다'라고 평하기는 어렵다. 가끔씩 갸우뚱하게 되는 포인트도 있고, 굳이?라는 생각이 드는 잔혹한 장면들도 있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감독의 의도일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충분히 다시 한번 짚어볼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와 인물들이 존재했다.
이야기해보고 싶은 꼭지는 다음과 같다.
1. 오토바이의 역할
2. 낚시, 물고기, 그리고 아버지
3. 죽어 있는 채로 살 것인가, 살기 위해 죽일 것인가.
<화란> 속 오토바이의 역할
<화란>에서 오토바이는 빼놓을 수 없는 소재이다. 주로 사람들에게 위험한 이동 수단으로만 비치는 오토바이지만, <화란> 속에서는 좀 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다양한 버전의 영화 포스터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만 봐도 중요한 소재임이 틀림없다.)
배달일을 하는 완구나 배달이 필요한 업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계의 수단이고, 오토바이를 훔쳐다 고리대금과 함께 오토바이를 재판매하는 치건네에게는 사업 수단이지만, 완구가 연규의 오토바이를 고장낼 때는 위협 수단이 되기도 하고, 결국 연규와 하얀 이 명암시를 떠나는 도망 수단이 되기도 한다.
오토바이가 지닌 특성상 <화란>의 긴박한 분위기를 더욱 쫀쫀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시끄러운 시동소리에 더불어 일반 자동차처럼 문 뒤에 나를 숨길 수 없는 수단이기에, 연규가 오토바이를 훔치는 순간이나 달아나는 순간에 혹여 연규가 들키지 않을까 긴장감이 배가 되도록 하는 장치였다. 상대적으로 가볍고 작아 쉽게 도둑질, 손질당할 수 있고, 큰 기술 없이도 시동을 걸 수 있는 특성 때문에 치건네의 사업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오토바이는 위태로운 명암동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존재다. 보호받지 못하고, 언제든 훔쳐질 수 있으며, 말 그대로 위험한 이동수단이자 삶인 것이다.
명암동 사람들은 모두 바로 그 오토바이에 삶을 싣고
힘겨운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며 지옥 여기저기를 질주한다.
유일하게 명암을 떠나 화란을 향해 도망친 연규와 하얀을 빼고 말이다.
낚시, 물고기, 그리고 아버지
오토바이가 <화란>에서 전반적인 명암시의 분위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명암시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소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면, <화란>의 이야기 전반을 구성하는 데에는 '낚시', '물고기', '아버지'를 빼놓을 수 없다. 연규와 치건이 서로에게 강한 감정적 울림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둘 모두의 삶은 '새로운 아버지'라는 존재에 의해 크게 꺾이고 뒤틀린다. 그리고 그 강한 새아버지를 만나게 된 계기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했다는 점에서 낚시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치건은 실제로 '큰 형님'의 낚싯줄에 걸려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연규도 치건도 어찌 보면 '잡힌 물고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연규는 아버지라는 말만 나오면 치를 떨고 화를 내면서도, 정작 새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떠는, 하얀의 뒤에서나마 숨죽이며 덜 맞기를 바라는 연약한 물고기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치건 역시 큰 형님의 말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따른다. 자신은 이미 잡힌 물고기고 죽었던 목숨이었기에, 남은 삶은 자신을 잡아 숨을 다시 붙이게 해 준 큰 형님에게 바친 듯하다.
그렇기에, 물고기는 물고기를 알아봤다. 치건은 연규를 다른 동생들보다도 더 살뜰히 챙기며 보듬고 껴안는다. 연규가 그런 치건에게 자신을 모르면서도 왜 이렇게 잘해주냐고 묻자, 치건은 '내가 너를 왜 몰라'라고 답한다. 둘은 어찌 보면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서로에게 공감하고 동정한다.
죽어 있는 채로 살 것인가, 살기 위해 죽일 것인가.
하지만 같은 삶 속에서도 연규와 치건은 서로 다른 곳을 본다.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도 연규는 언제나 '화란' 즉 네덜란드로의 도망을 꿈꾼다. 자신에게만 주어진 것 같은 지독하고 고통스러운 삶, 지긋지긋한 명암을 떠나, 모두가 비슷하게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네덜란드로 귀화하고자 작은 꿈을 모아 보물 상자에 몰래 보관한다. 비록 새아버지와 치건 앞에서, 하얀의 뒤에 숨어 덜 맞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노력한다. 연규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은 없다. 아직 살아있는 연규에게는 이유도 명분도 아직은 중요하다.
연규는 살고자 한다. 도망치고자 한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발버둥 친다.
반면 치건은, 이미 자신은 한 번 죽은 목숨이고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아갈 뿐이다. 필요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라는 이유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고, 잔인한 행위를 서슴 치도 않으며, 큰 형님에게 그저 복종한다. (송중기의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잔혹한 행위를 하는 모습이 오히려 그런 치건의 '삶에 대한 무감정'을 더욱 돋보이게 한 부분도 있었다) 그나마 자신과 비슷한 연규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왔기에, 앞으로도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으로 보이자 안쓰러운 마음으로 연규에게 꿈같은 것은 꾸지 말라는 조언과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도 한다.
치건은 죽었다. 죽은 채로 숨만 쉬며 살아갈 뿐이다.
그래도 둘은 서로를 만나 작용하고 반작용하며 나름 변화하기 시작한다.
연규는 결국 살기 위해 정의석에게 상해를 입히기도 하고, 자신의 손을 희생해서라도 조직에서, 명암시에서 도망치려 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치건을 죽이기까지 한다. 연약하기만 했던 연규는 그렇게 또 다른 아버지인 치건을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 하얀과 명암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향해 오토바이로 달린다. 뒤에만 숨던 하얀을 자신의 뒤에 태우고.
연규는 자신의 손을 혹은 남을 죽여서라도 연규는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행동하는 인물로 거듭난다.
치건 역시 마냥 죽어있는 삶에만 남아있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연규의 보물 상자를 본 이후 치건 역시 자신만의 상자를 만드는데, 개인적으로 이 상자의 모습이 마치 관짝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상자 속에 있던 물건은 큰 형님이 자신을 낚았을 때 사용했던 낚시 고리. 연규는 가고자 하는 곳을 향한 희망을 모으는 방식으로, 치건은 자신을 옭아맸던 낚시고리에 장례를 치르는 방식으로, 조금은 다른 삶을 살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치건은 연규가 조직에서 도망갈 수 있도록, 이미 죽은 자신의 목숨을 다시 한번 연규에게 내놓는다. 죽은 채로 살던 치건의 삶은 그렇게 연규의 새로운 삶의 발판이 되어 다시 한번 더 죽어간다.
홍사빈과 김형서라는 배우의 새로운 발견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던 영화였고, 그 와중에 영화 리뷰를(종종) 쓰는 나로서는 흥미로운 구성에 꽤 끌림을 얻었다. 네이버 영화 코멘트나 평점을 보니 대중들에게 크게 사랑받지는 못한 듯하고 그 이유도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저예산 영화이기도 하고, 김창훈 감독에게는 이 작품이 데뷔작이기에 분명 완벽히 대중들에게 울림을 주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감독에게 앞으로는 기대가 되는 부분이 많았던 영화이기도 하고, 관람하기에는 몰라도 분석하기에는 재밌는 영화라고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