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지극히 주관적으로, 나에게 예술이란 비극적인 것이다.
감정이 크게 요동쳐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우울함이 느껴지면, 이상스러운 쾌락 감을 느낀다. 노래도, 영화도, 책도 그렇다.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들은 왠지 모르게 손이 가지 않는다. 행복한 노래가 길거리에서 오만하게도 큰 소리로 흘러나올 때면, 팔짱 끼고 흘겨보며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는 나는, 그래, 참 삐뚤어졌다. 하지만, 영화나 음악을 듣다가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흐르면 '아 내가 슬프고 있구나, 감정이 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살아있음을 느끼고 이상한 뿌듯함이 든다.
사랑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공중파)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이유는 딱 두 가지다. 기본적으로는 기다리는 것이 싫고, 게다가 과시하는 듯한 로맨스가 싫다. 아마도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집합으로 표현한다면, 행복에 대한 감정보다는 슬픔에 대한 감정의 교집합이 훨씬 크고 잦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참 아이러니한 작품이었다. 독자에게 주는 불안한 감정, 우울한 기운의 관점에서 봤을 때, 기승전결로 표현하자면 기승저어어어어어언결 하는 전개로 진행되는데, 하필 주제는 또 사랑이다. 사실 이 책의 유명세, 그리고 민음사에서 나온 책이라는 믿음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민음사 책이 아무 이유 없이 좋다. 저 디자인의 책은 다 마스터해버리겠어하는 결심이 든달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좋은 내용이 있으면 귀퉁이를 작게 접어두는 습관이 있다. 나중에 이런 부분들만 살짝 한 번 더 들여다보면 다시 감정이 살아나곤 한다. 가끔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그냥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하여튼 그런 습관 덕을 좀 보고자, 이 책을 읽으며 접어둔 종잇장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며 떠오르는 것을 적어본다.
책의 제목처럼, 이 이야기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삶의 주기에 따라 '슬픔'의 정의는 다르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배고픔이 곧 슬픔일 것이고,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서는 떠나간 나의 동반자들이 곧 슬픔일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슬픔이다. 그리고 그 슬픔은, 아프게도, 사랑의 크기만큼 혹은 그 수천수만 배로 느껴지고는 한다.
사랑이라고는 해도, 젊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도 많다. 연인은 물론이고, 간절한 꿈과 소원들, 나의 강아지도 내 정열적인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젊은 베르테르에게 그 대상은 오직 '로테'였다. 나의 직업과 나의 자존심, 나의 적더라도 정기적인 수입은 베르테르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랑이 점점 더 압도적이 어지면서,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더 이상 '대상' 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베르테르는 로테로부터 태어난 존재가 된다. 로테의 시선이 머무른 하인이라도 곁에 두고자 로테를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하인을 로테에게 방문케 하곤 하는 걸 보면, 로테가 곧 베르테르의 삶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로테가 없는 것은 베르테르의 삶의 종결과도 같다.
대학에서 들었던 수업에서 기억에 남는 교수님의 말씀이 있는데, 돌이켜 보니 그게 바로 이런 내용이었던 듯 싶다.
사랑은 곧 죽음이다. 사랑을 하면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나를 완전히 버리고 상대와 하나가 된다. 더 이상 나는 없고 하나된 사랑만이 존재한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진짜 생물학적인 죽음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쨌든 안타까운 베르테르는 정말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죽음으로써 사랑을 증명했다. 말 그대로 '죽을 만큼 사랑한' 것이다. 사실 베르테르가 아니고서라도, 우리 주위에서도 꿈을 좇기 위해 집도 건강도 수입도 포기하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행복하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꿈과 미래고, 미래의 내 모습에 나의 영혼을 일치시키며 지금의 나를 없앤다. 지금의 내가 추락함으로써 나의 사랑, 나의 꿈과 나는 더욱 가까운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은 참 숭고하다.
베르테르가 살았던 1700년대 후반에는 지금의 우리처럼 애정의 대상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사랑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 나의 핸드폰도 사랑해야 하고, 어제 산 신상 가방도 사랑해야 하고, 새로 출시된 게임도 사랑해야 하고, 심지어 나의 고객도 사랑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을 구하는 것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너무나 관대한 우리들은, 아주 소중하고 아름다운 우리들의 사랑의 큰 파이를 쪼개서 망설임 없이 그것들에 나누어 준다.
베르테르와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적고 깊었다. 로테 외에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가져간 것은 몇 개 없었다. 좋아하는 장소들마저 로테에 대한 사랑이 깃든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 독자들은 베르테르의 '죽을 만큼 큰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그 죽을 만큼의 사랑을 동경했고, 오죽했으면 이 책이 발행되고 약 2000명의 젊은이들이 모방 자살을 했을 지경이었다.
최소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야금야금 사랑하면서, 결국은 '죽을 만큼 사랑할 단 하나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사는 동안 줄 수 있는 사랑의 파이를 가지고 있다고 봤을 때, 우리 중 대부분은 그것을 적당히 나누며 그럭저럭 적당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숭고함을 위해, 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 만큼 사랑'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주위에서는 폐인이라고 손가락질할 지라도, 그들을 비웃어주자. 너는 무언가를 죽을 만큼 사랑해본 숭고한 인간이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