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고
인간은 다양한 것에 공포를 느낀다. 높은 곳, 귀신, 맹수 심지어는 인간에게 최대로 끼칠 수 있는 피해라 봐야 '간지러움' 뿐인 개미도 공포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공포에 대처하는 태도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에 개성을 부여하는 큰 부분이다
몸집이 큰 동물을 만나거나 공격을 인지한 동물들은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도망'을 친다. 외면하고 '보지 않음'으로써 공포를 잊고자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대상에서 멀어지면, 기억에서조차 공포를 잊는다. 하지만 인간에게 '본다'라는 것은 동물만큼 직접적인 공포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인간은 쓸데없이 작은 공포의 단서라도 떠올리기 시작하면, 그 특유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공포를 극대화시켜가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놀라운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망과 외면은 공포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공포의 대상을 희화화 하거나 타파할 해결책들을 찾아내곤 한다. 혹은 공포의 대상과 익숙해지기 위한, 혹은 되려 즐길 대상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일종의 트레이닝 같은 걸 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번지점프나 귀신의 집 같은 걸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공포의 대상이 인간이 됐을 때, 익살이라는 처세술이 피어난다. '나 자신에 대한 비하'와 '타인에 대한 공포'가 스스로를 괴롭힐 때, 그러면서 내면과 외면에서 모두 나에게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익살을 떤다. 나를 가리고 남을 속이며 적당한 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써 익살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괴상함이다. (어떤 개가 다른 개를 웃기기 위해 뒷발로 코를 후비는 짓 따위를 하진 않겠지. 아마도.) <인간 실격>의 요조는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익살꾼이었다.
<인간 실격>이 나에게 갖는 의미는, 올해 들어 가장 빠르게 완독한 책이라는 점이다. 단 한 줄도 불안하고 불편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답답하고, 어딘가 어색하며, 성별을 잘못 타고난 것처럼 인간이라는 종으로 잘못 타고난 것 같은 인물, 요조 때문이다. 그만큼 요조라는 인물은, 이야기 속에서는 물론이고 독자의 시선까지도 끌어내는 불행한 매력, 불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요조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반쯤인 실존했던 인물이다. <인간 실격>을 통해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에 대해 처음 알았지만, 이 책은 다자이 오사무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서문을 읽고 내가 느낀 감정은 '역겨움'이었다.
필자는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지만, 한 사람의 세 사진을 차례차례 묘사한다.
1. 주먹을 꼭 쥐고 우스꽝스럽게 원숭이 같은 미소를 짓는 소년,
2. 피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능글맞은 표정의 이상한 미남,
3. 하다못해 죽을 상이라도 됐으면 좋을 짜증 나고 역겨우며 인상 없는 얼굴을 한 남자
왠지 이 세 사진들에 대한 필자의 묘사만으로도 인물의 삶이 잘만 그려지는 기분 나쁜 기적이 펼쳐졌다. 익살이 시작일지 공포가 시작일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에 대한 그 두 가지 반응이 화학적으로 얽히고설켜 만든 괴물 같은 인간이 그려졌고, 동시에 역겨움을 느꼈다.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내 눈 앞에서 내 내장을 끌어내다가 '오늘 당신은 점심으로 펜네면 파스타와 토마토 피자를 먹었군요'라는 의사의 진단을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굳이 알고 싶지 않은 평범한 일상의 실체가 가장 괴기스러운 방법으로 내 눈앞에 떡하니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 것만 같아서 역겨웠다.
수기들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반쯤은 '요조'의 인간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에 대항하기 위한 익살, 그리고 그 익살의 실체를 누군가가 알아채지 않을까 하는 또 다른 공포의 연속으로 굴러간다.
우리들에게 익살꾼들의 비애는 아주 익숙한 주제다. 피에로의 슬픔, 광대의 눈물은 이미 다양한 음악과 영화의 이야깃거리가 된 지 오래고, 구글에 '피에로'를 검색하면 맥도널드의 피에로같이 밝고 명랑한 모습들을 기대했던 내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갈길 정도로, 아래와 같이 공포스러운 이미지들이 검색된다. (정말 놀랐다)
하지만, '익살꾼의 슬픔'과 '공포로 인한 익살'은 얼핏 비슷한 축의 감정 같아 보여도 그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익살'은 사전적 의미로 남을 웃기기 위해 하는 행동이나 말 등이다. 그리고 익살꾼의 슬픔은, 나로 인해 깔깔대는 '타인'과 달리, 진실되지 못한 웃음을 연기해야 하는 본인을 되돌아보며 스멀스멀 생겨난다. 즉 자신의 익살로 인해 피어나는 사람들의 웃음에 정작 자신은 동화되지 못하는 슬픔이다.
반면에, 인간에 대한 공포로 떠는 요조의 익살은 '다른 인간들과 동화되지 않기 위한 익살'이다. 익살을 떨며 즐겁게 해주지 않으면 화를 낼 것만 같은 공포의 인간들. 그들을 안심시키고 진심을 숨길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익살. 그래서 요조는 자신의 거짓 가득한 위선적 익살에 사람들이 자지러질 때, 그때서야 안도감을 느낀다. 잘 속여냈으리라. 나는 훌륭한 익살꾼으로 완벽히 보일 것이리라.
요조에게 익살은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를 안전하고 철저히 분리해주는, 유일한 장벽이었다.
그래서 요조는 그 익살의 장벽에 생기는 작은 틈들로, 공포에 덜덜 떨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훔쳐볼 가상의 인물들 역시 두려워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인물들이 요조의 등을 쿡 찌르며 등장할 때마다 요조는 죽음의 공포와 비슷한 무엇을 느낀다. 또 그들이 자신의 진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면서 익살의 가면을 깨부술까 두려워한다.
사실 요조의 모습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요조의 익살은 우리들의 화장, 명품 시계 같은 것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 부끄러운 것을 자연스레 가려주는 '무엇'인 셈이다. 다만, 요조는 자격지심조차도 없는 인간이었다. 최소한 우리는, 누군가 우연히 내 명품 가방 안에 담긴 휴대폰요금 연체 고지서를 봤을 때, 혹은 번진 화장을 보고 옆사람이 쿡쿡대며 나를 손가락질할 때,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화를 낼 만큼은 나 자신을 존중한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나마 말이다.
하지만 요조는 그러지 못했다. 지나치게 순수하고 잘 믿었고 예민했다. 주장이라는 것을 할 자존감조차 없었다. 익살로나마 정상적인 인간들 속에서 버텨오던 요조는, 결국 아내와 친한 친구의 다정한 미소에 속아 정신 병원에까지 다다르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실격시킨다. 동시에, 익살의 벽이 점차 허물어져가는 만큼, 요조는 죽음과 술과 모르핀에 가까워진다.
생각해보면 익살을 떨며 인간에 대한 공포에 저항하려 하는 것은 비단 요조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요조가 그랬듯이, 처음 보는 사람들, 우리들에 대해 백지의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앞에 서면 왠지 그들의 나에 대한 평가가 무서울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평소보다 더 활발한 척, 웃긴 사람인 척 연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정말 밝고 긍정적인 분이시네요'라는 상대방의 말 한 마디를 듣고 나면, 기묘한 안도감이 든다. 이제부터는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들은 굳이 숨기지 않아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서 오는 안도감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능청스러운 익살꾼이 되어간다.
공포스러운 것들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척하는 능청스러움이 늘어가고, 나를 숨기는 것에 익숙해진다. 어느 정도에 다다르면 공포스러운 게 없다고 스스로 믿을 정도가 되고는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 익살이 허물어질 때의 당혹감은 커진다. 거짓 익살의 실체는 결국 자신의 파멸인 것이다. 요조라는 인물을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면, 익살이라는 것은 공포에 대한 적합한 처세술이 아닌 것으로 이미 판명 났다고 보인다. 익살이 거짓인 만큼 그로 인해 오는 안도감도 거짓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요조는 불행하지만 매력을 지닌 캐릭터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책 속의 요조일뿐이다. 우리의 삶은, 덜 매력적이더라도 더 소중하고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경계해야 한다. 내가 어느새 너무나 능숙한 익살꾼이 되어있지는 않는지.
추가 메모
: 일본 문학에서 자살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는, 흥미로운 경향이 있다. 내가 읽은 많은 일본 소설들에서 많은 주인공들이 자살했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실제로 작가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케이스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