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또 Apr 21. 2016

헤밍웨이와 노인과 청새치의 '삼위일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책을 좋아한다고 많이 읽어왔는데,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어찌 보면 다행이지 싶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노인과 바다>는 지루하고 따분할만한 여지가 충분하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 같은 흥미진진함에 푹 빠져있던 과거의 나는, 분명히 이 책을 읽다가 금세 싫증내고 덮어버렸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렇다. <노인과 바다>는 이야기로만 보자면, 거짓말 안 보태고 한 줄 요약이 가능하다.

노인이 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열심히 잡았는데
돌아오다가 상어들한테 어이없이 다 뺏김


내용으로 봤을 때는 정말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의 매력은, 복잡하고 미묘한 인물 구도나 나도 모르게 페이지가 막 넘어가는 긴장감 같은 것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통해, 소설의 조용한 매력을 맘껏 발산해냈다.  


책에도 나오는데, 스페인어는 '바다'를 부를 때 남성형 명사 '엘 마르'와 여성형 명사 '라 마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노인과 바다>를 접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영화와 책들 그리고 내 개인적인 바다에 대한 경험을 통해 그동안 바다를 '엘 마르'로 여겨왔다.


엘 마르의 바다는, 인간이 싸워내야 하는 존재이다. 끊임없이 인간에게 고난과 역경을 들이붓고 인간은 엘 마르의 바다를 정복하려 든다. 인간에게 엘 마르의 바다는 그저 상업적인 일터일 뿐이며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또 하나의 적이다. 예를 들어,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라든가 인기 있는 시리즈 영화였던 '캐리비안의 해적'같은 경우만 보아도, 바다는 인간에게 상업적 이득을 위해 나가야 하는 일터이며 공포스러운 존재이자 이겨내야 하는 존재이다. 바다에 지는 것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라 마르의 바다는 다르다. 어머니와 같은 바다인 라 마르는, 언제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재앙을 안겨줄 수 있는 그런 존재다. 그리고 이러한 바다의 특성을 헤밍웨이는 너무나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낸다.

달이 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바다에도 영향을 미치지


즉, <노인과 바다>는 어떻게 보면 노인과 바다 사이의 사랑과 같은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가 노인의 연인 같은 존재일지 엄마 같은 존재일지는 해석하기 나름이겠다. 하지만 어찌 됐든 노인이 바다를 사랑한 만큼 바다 역시 노인을 사랑하고 있었고, 어떨 때는 노인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기도 하지만 노인은 그녀의 가혹함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노인이 사랑하는 것은 바다만이 아니다, 노인이 이 소설 내내 사랑하는 대상은 크게 셋이다.

(물론 나머지 둘도 바다에서부터 파생되는 사랑이기는 하다)


1. 바다

2. 소년

3. 청새치


소년은, 자기 자신과의 혼잣말을 제외하고, 노인이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소년의 특징을 다시 한 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소년은 운이 좋은 어부다. 노인이 계속해서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는 동안, 소년은 소위 '운 좋은 배'에 타서 계속해서 물고기를 잡아온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소년은 노인과 한 배를 타지 않음에도 마치 자신의 아버지처럼 노인을 따른다. 노인이 먹고 마실 것들, 노인이 즐겨보는 신문들, 노인이 낚시에 쓸 정어리들, 노인이 옮겨야 할 어구들을 옮기는 일까지, 마치 노인의 수호천사처럼 모든 것을 돕고 신경 써준다.


재미있는 점은 소년의 이름인 '마놀린'이 스페인어로 '빛나는 상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노인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상어의 간유를 마시고는 하는데, 마놀린 역시 상어의 간유처럼 노인의 삶을 지탱해주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그래선지 노인이 바다 위에서 힘든 시간을 겪는 순간마다, 언제나 마놀린을 떠올리며 그가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의 소리를 입버릇처럼 한다. 건강하고 젊음의 빛이 항상 반짝이는 마놀린은, 노인의 가치관과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켜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또한 마놀린은 노인에게는 없는 낚시운과 젊음과 사람들과의 호의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딱 맞는 퍼즐들이 서로 파이고 나온 곳이 반대되듯이 소년과 노인은 많은 면에서 반대되지만, 그렇게 서로 잘 맞는 퍼즐 같은 존재로 항상 서로를 사랑하고 믿는다.

소년은 마치 '노인(아버지)과 바다(어머니) 사이에서 낳은 아들'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새치. 노인의 분신이자 노인의 친구이고 형제이며 동시에 노인이 죽여야만 하는 대상이다. 이야기의 80퍼센트 정도는 노인이 이 청새치를 잡기 위해 겪는 일들이다. 사실 청새치 자체가 살아있는 상태로 노인의 눈앞에 등장하는 것은 고작 두세 번 남짓 정도이다. 노인의 미끼를 물고 나서 며칠이 지나도록, 청새치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저 바다 깊은 곳에서 헤엄을 친다. 그러는 청새치에게 노인은 일종의 연대감, 동질감, 경이감을 느낀다. 노인은 피로와 상처,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들어버린 나이로 인해 청새치를 잡는 게 쉽지 않음을 스스로도 인지한다. 그럴 때마다, 미끼를 아프게 물고도 끝없이 힘차게 헤엄치는 청새치를 보며 동질감을 느끼고, 그로부터 위안과 일종의 응원 같은 것을 얻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생애 처음으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물고기가 될 청새치를 사랑한다. 청새치를 죽이기 위해 계속해서 쫓아가고 있는 상황임에도 마치 청새치를 '여행의 동반자'처럼 여기고 정해진 운명의 길을 함께 가고 있는 듯한 말을 계속해서 청새치에게 건넨다. 그러고는 청새치를 형제이자 친구로 부르며, 청새치가 자신을 끌고 가는 것인지 자신이 청새치를 쫓아가는 것인지조차 헷갈려한다. 청새치를 잡은 이후에도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고, 청새치를 배에 묶어 마을로 돌아가는 모습은 마치 청새치와 노인이 '같이' 마을로 헤엄쳐가는 듯한 광경을 연출한다. 죽은 청새치를 탐내며 몰려드는 극성맞은 상어들을 물리치면서도, 노인은 '너랑 나 둘이서 많은 상어를 죽이고'라는 표현을 통해 마치 자신과 청새치가 하나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동료애를 느낀다.


청새치를 지키기 위한 노인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탐욕스러운 상어들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바람에 결국 청새치는 뼈만 남기고 만다. 노인은 그것이 마음이 아파 어느 순간부터는 청새치의 몸뚱이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 지조차 보고 싶지 않아한다. 고기를 죽이고도 지켜내지 못해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마을에 돌아온 이후 노인은 뼈만 앙상히 남은 청새치를 뒤돌아보고, 말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사실 헤밍웨이는 이 <노인과 바다>를 쓰기 전까지 문학계에서 거의 위기에 몰렸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후 실패작으로 불려지는 <강을 건너 숲 속으로> 외에는 별다른 작품을 내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작가로서의 생명에 사망 진단이 내려진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헤밍웨이의 미래 작품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압도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헤밍웨이는 바로 이 <노인과 바다>를 쓰며, 이런 비판과 우려들을 단번에 잠재웠다. 이후 노벨 문학상과 퓰리쳐상을 수상하며 헤밍웨이는 다시 일어섰다.


책을 읽으며 생각한 바로 그 노인의 이미지와 똑닮은 헤밍웨이

이런 뒷이야기를 알고 나니 더욱 분명 해지는 것은, 노인은 헤밍웨이 그 자신을 그대로 투영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노인이 계속해서 물고기를 잡아오지 못하자 마을 사람들이 노인을 놀리는 상황은, 마치 헤밍웨이의 미래를 암울하게 예측하던 비평가들, 독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인다. 노인이 그들의 놀림에도 꿋꿋이 할 일을 해가고, 발전된 낚시 기술 등의 요행이 아닌 전통적인 낚시 방법으로 계속해서 스스로의 목표에 도전해가는 모습은, 헤밍웨이가 다른 이들의 비판에 귀를 닫고라도 스스로를 믿고 신념에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노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끊임없는 혼잣말이었는데, 그 혼잣말은 사실상 헤밍웨이가 노인에게, 혹은 노인이 헤밍웨이에게 거는 대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이 늙은이야, 힘을 내란 말이다.", "이보게, 늙은이, 자네나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감을 갖도록 하시지." 같은 대사들이 헤밍웨이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소설 속 노인에게 던지는 응원의 메시지로만 보였다.


하지만 소설 후반부에 왠지 노인의 미래가 건강하지만은 않다는 불안한 느낌이 든다.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결국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청새치를 나쁜 상어들에게 뜯겨버린 것 자체도 생명력을 잃은 노인의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노인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진다.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 상어와 싸우던 자신의 입에서 이상한 맛이 남을 느낀다. 물론 노인은 앞으로 소년과 함께 낚시를 갈 것을 희망하고, 마을 사람들과도 더욱 소통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왠지 책의 끝에서 노인이 잠들어있는 모습이 곧 편히 숨을 거둘 것만 같은 느낌이어서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 근거로, 노인과 소년의 대화 속에서 '고기에게 지지 않았다'라는 말을 하는데, 노인이 낚시를 하면서 내뱉었던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는 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연관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패배하지 않았지만, 결국 파멸되고 죽음에 가까워진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안타깝게도 헤밍웨이는 이 소설을 쓴 후 몇 년 있다가 우울증 등으로 인해 엽총으로 자살을 한다. 지나친 도약일 수도 있지만, 청새치와 노인과 헤밍웨이가 거의 삼위일체일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닮았다는 관점에서, 헤밍웨이의 죽음으로부터 왠지 노인과 청새치의 마지막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노인과 바다>라는 마지막 훌륭한 작품을 남기기 위해 헤밍웨이라는 노인은 거의 2m를 넘는 청새치를 잡는 일처럼 모든 생명력과 실력을 쏟아부었지 않았을까. 결국 청새치도 노인도 마을로 돌아왔을 때의 모습이 아름답고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스토랑에 있던 이들이 죽은 청새치의 꼬리를 보고 '저렇게 멋진 꼬리를 본 적이 없다'라며  치켜세우는 모습이, 헤밍웨이 자신의 마지막이 풍족하지는 않을지언정 고귀하고 가치 있기를 바라는 헤밍웨이의 소망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꼬리만을 남기고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겠다는 헤밍웨이의 신념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공포와 익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