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 아버지의 끝없는 꿈,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고
최근 예술의 전당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건물에 매달려 펄럭이고 있는 연극 광고 천막을 보았다.
세일즈맨의 죽음
평소에 연극이라고는 대학로에서 본 한국 창작 연극들이 다였던 터라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연극이라고 하니 괜히 눈길이 갔다. 결국 연극을 보지는 못했지만 강렬했던 극 제목을 잊지 못해 이것저것 검색해 봤고, 이 연극이 아서 밀러에 의해 쓰인 희곡임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책을 주문했다. 대학교에서 수업 과제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읽었을 때가 생각이 나서였다. 사실 희곡 대본을 책으로 읽는다는 게, 그때 당시에는 참 어색하고 이상하게만 느껴졌었다. 극을 위한 대본을 글로만 읽는다는 것. 마치 과자를 사다 놓고 먹지는 않으면서 영양성분표만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하지만 일단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누구나 희곡만의 매력에 사로잡힐 것이다. 작고 검은 무대 위에 작가의 친절한 가이드에 따라 내가 상상하는 연극배우를 올려놓고 내가 원하는 대로 배우를 울고 웃게 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작가 아서 밀러는, 연극이라는 작지만 자유로운 공간의 특성을 너무나 잘 활용한 작가이다. 몇 발자국 움직이면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상상 속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동시에 대화를 나눈다.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특권인 특수 효과나 편집의 화려함 없이, 무대 연출과 인물들의 대사나 조명 같은 것들로만 바로 눈 앞에 있는 관객들을 쥐락펴락해내는 것이 연극 그리고 희곡의 힘이다.
작중 인물들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서른네 살의 큰 아들 비프 로먼은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제 앞가림을 온전히 하지 못해 부모의 우려를 한 몸에 받는다. 아버지 윌리 로먼은 가족들과 보험금, 집 할부금 등을 내기 위해 수십 년 간 세일즈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적은 예전만 못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주정신이 이상해지는 바람에 줄곧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며 비프와 다투기 일쑤다. 이 외에도 극의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분위기의 이름과 성격 지닌 작은 아들 해피, 남편의 맘고생 몸고생을 다 이해하고 누구보다도 남편을 사랑하는 헌신적인 아내 린다가 등장한다.
이들 네 가족은 서로를 무척 사랑하고 아끼지만, 서로 어딘가 조금씩 비틀어져 있다. 그리고 그 비틀어진 틈새로 계속해서 가족들의 과거와 상상과 거짓들이 흘러나온다. 아슬아슬 줄타기하듯 이 틈은 그 크기를 달리하며 극 중간중간 긴장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바로 그 틈새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꽉 움켜쥐고 놓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독자만 알고 있다.
비프: 이 집에서는 단 십 분도 진실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요!
큰 아들 비프는 극의 분위기가 잠잠하게 흘러가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묻는다. 진실이 무엇이냐고. 단지 비프만이 아버지가 사로잡혀가는 과거를 현재로 돌려놓고, 거짓된 자기 최면에서 깨어나도록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인물이다. 하지만 비프는 몰랐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를 말이다. 아버지가 집착하고 있는 과거와 허상은 아버지가 좇고 있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큰 아들 비프의 행복한 삶이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의 행복할 수 있었던 삶, 창창해 보이기만 했던 미래를 망가뜨린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극적인 악순환은 끝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 돼버렸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때문에 과거를 살고 있고, 아들은 현재의 아버지에게 되풀이해서 죄를 묻고 있다. 윌리는 과거에는 자신의 자랑이었던 비프를 잊지 못하고, 비프는 망가져버린 현실과 동떨어진 꿈만 꾸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괴한 방식으로 서로를 붙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부자는 서로를 분명하게 사랑하고 있다. 꿈꾸는 세일즈맨과 꿈을 잃어버린 세일즈맨의 아들은 결국 서로를 포기하는 듯 하지만,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랑은 비극적이지만 분명해진다. 아들에 대한 어찌 보면 허황된 믿음일 지라도, 세일즈맨은 아들의 사업 자금을 대겠다며 자신의 형인 '벤'의 허상을 따라 죽음을 향해 차를 몰아간다. 드디어 기다리던 주택 할부금을 다 갚고 완전히 집이 자신의 것이 되기 바로 그 전날 말이다.
비록 내가 읽은 희곡이라고는 몇 편 되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세일즈맨의 죽음>은 가장 강렬했다고 해야 할까. 단 24시간 안에 벌어지는 짧은 이야기지만, 모든 순간순간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21세기 초반의 한국'에 살고 있는 내가 '20세기 중반의 미국'에 쓰인 작품에 애정이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몇 가지 심리적인 기제들 때문일 것이다. 신기하게도 마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한국을 그린 것만 같은 대사들이 정말 많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들, 바로 옆집에서 들려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대화들을, 이 희곡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외친다.
윌리: 나이 서른넷이 되도록 제 앞가림을 못한다니 망신이지!
윌리: 사람들이 너무 많아! 경쟁 때문에 사람이 미칠 지경이지! 아파트에서 나오는 악취 좀 맡아봐! 다른 쪽에 또 아파트가 하나 더 있지!
린다: 얘야,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잖니. 이제 다른 곳에서 용돈을 받으니까 아버지에겐 신경도 안 쓰더구나
윌리: 사장님. 영업할 때도 존경과 우정과 감사가 있던 시절이란 말입니다. 요즘은 그런 것일랑 깡그리 사라지고 말라비틀어지고, 우정이라든가 인간미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단 말입니다.
과거와는 달라진 것들에 대해 누군가는 적응하고 이용하며 누군가는 부정하고 도태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작중의 로먼 가족들은, 그 과거와 현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 한국 사회의 많은 이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현재를 이끌어가는 많은 이들은 과거의 추억을 양분 삼아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그것이 현실의 고통 때문이든 찬란했던 과거에 대한 미련 때문이든 우리는 현실에도 과거에도 속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는 미래를 위해 경쟁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야 하며, 그러면서 한 명의 승리자와 수많은 추락자들이 생겨난다. 그 추락자들에게 '미래'란 멀고 먼 것이다. 마치 비프처럼 말이다.
린다: 그러고도 성격이 이상하다고? 평생을 너희를 위해 일한 사람에게 할 소리냐, 그게? 너희가 금메달을 걸어드려야 하는 것 아니니? 이게 그 보상이냐?
하지만 비프가 그랬던 것처럼, 비록 사회적 패배자일지도, 우리들 모두는 아버지의 자랑이었던 적이 있다. 지금도 당신들의 심장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식들인 우리일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가졌던 그 거대하고 찬란했던 후광을 어느새 직접 거둬버리고, 동시에 아버지를 과거 속에 가둬버린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옛날 얘기를 하면서 우리를 아이 대하듯 하시는 이유는, 당신들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때도 지금도, 평생을 가족을 위해 일하고 계실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과거와 허상 속에서 살았고 또 죽었다.
윌리는 비프가 서른넷 무직자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른 이들에게 아들을 소개할 때면 항상 '좋은 직장'을 다니는 것처럼 말하고 다닌다. 비프가 일개 배송 직원으로 일했던 회사에 대해서도, 비프가 마치 요직을 맡고 사장에게 신임을 받았던 직원이었던 것처럼 스스로, 그리고 가족들에게 계속해서 최면을 걸어왔다. 정작 자신은 항상 남들에게 미소를 짓고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세일즈맨이지만, '열일곱 살에 정글에 들어가 스물한 살에 부자가 되어 나온' 죽은 형 벤의 허상을 계속해서 눈 앞에 불러오며 그 벤이 자신의 아이들을 인정해주고 벤처럼 '대단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만큼이나 윌리는, 아들 비프만은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항상 친절하고 웃기만 해야 하는 세일즈맨이 아니라, 남들 앞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그런 삶, 진짜 부자 말이다.
비프: 당신은 방금 왕이 걸어나가시는 걸 본거요. 고난을 겪는 훌륭한 왕이죠.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왕이요.
찰리: 세일즈맨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하늘에서 내려와 미소 짓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그 미소에 답하지 않으면, 그게 끝이지. 모자가 더러워지고, 그걸로 끝장이 나는 거야. 이 사람을 비난할 자는 아무도 없어.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거든. 그게 필요조건 이아.
그리고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프는 자신이 그렇게나 바라던 진실을 조금이나마 깨달아 간다.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그 꿈들, 아들들의 자랑스러울 미래들, 그 미래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던 아버지의 피나는 고난들. 과거를 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미래를 잃은 아들 비프는 아버지의 꿈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의 입을 통해, 그 아버지의 꿈이 얼마나 가느다랗고 고통스러운 바늘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아들들만은 그 바늘 위에 놓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 아버지.
그 고통에 비해 밝아 보이지 않는 아들들의 미래로 인한 더 큰 고통.
그로 인해 과거라는 환각제를 들이마신 아버지의 심정.
너무도 늦게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야기 내내 과거와 현실이 얽히고, 사실과 거짓이 얽히고, 아버지와 아들의 어긋난 사랑이 얽힌다. 하지만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빛나는 보석 같은 진실은 전혀 복잡하지 않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긋나지 않기를 '꿈'꾼다.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자신의 언어와 몸짓으로 상대방에게 전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뜻을 단번에 알아들을 만큼 영리하지도, 배려 깊지도 않다. 마치 신장개업 인형처럼 무시하고 지나가고는 한다. 그러면서 아마도 지겹다,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이 무엇인지 조금만 더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들의 꿈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소중한 시점이 너무 늦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윌리와 비프의 꿈들이 모두 비극으로 끝난 것처럼.
그리고 또 한 가지 좋았던 장치는, 부자도 멋진 남자도 아름다운 여성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든 인물들과 감정들이 평범한 독자로서 다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것들이었다. 대단해 보였던 아버지가 실제로는 허풍쟁이 세일즈맨이라는 설정, 비프가 서른네 살이 먹도록 직장도 없고 장가도 못 간 노총각이라는 설정은 이 작품이 쓰였을 당시의 관객들은 물론이거니와, 시대가 지나 바다 건너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가까운 인물들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만 한다.
아내인 린다가 아들들에게 했던 말처럼,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엄청난 영웅도 척척박사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일 뿐이다. 당신들이 영웅이나 척척박사가 아닌 평범한 아버지로 추락한 것은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있었던 그분들의 슈퍼맨 망토와 박사모를, 우리 손으로 빼앗아 헐벗게 한 것이다. 자식으로서는 그 기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내가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자식들의 꿈과 미래를 위해 입고 있던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이 정작 자식들의 손에 벗겨질 때, 그때서야 우리는 깨닫게 되겠지.
린다: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나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너는, 아버지를 미쳤다고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