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고
읽는 도중에 이 책은 영화화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서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전통적인 가치들이 서로 부딪히고 깨지는데, 거기서 오는 충격 감이 책을 덮고 나서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나 '가족'이라는 가장 단단하고 따뜻한 집단이 고작 작은 한 아이 때문에 해체되어가는 과정은 이 충격 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우리가 당연하게 연상하는 '가족'과 '행복' 사이의 연결 고리가, 그렇게 단단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도리스 레싱은 말하고 싶었던 걸까.
도리스 레싱(본명 도리스 메이 테일러 레싱)은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된 작가다. 나에게는 영국 여류작가라고 하면 제인 오스틴, 샬롯 브론테 정도만 떠올랐을 뿐, 도리스 레싱이라는 이름은 생소하게만 들렸다.(J.K. 롤링도 포함해야?) 영국 문학에 대한 내 조예가 너무나 얕아서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닌 탓도 있을 것이다.
도리스 레싱은 특이하게도 이란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짐바브웨의 황량한 초지에서 보냈다. 이러한 경험은 도리스 레싱에게 외로움의 원천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독특한 그녀만의 사고방식을 일궈낸 토대가 된 듯하다. 영국이라는 찬란하지만 엄격한 사회에서 오롯한 영국 숙녀로 자라는 대신, 그녀는 아프리카의 초지에서 그녀의 상상력과 자유로움을 키워내며 자유로운 여류 작가, 노벨상 수상 작가가 됐다.
<다섯째 아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고 기대했던 내용은, 실제 스토리 라인과 거의 정반대에 가깝다. 다섯 아이들 속에서 막내의 소외감, 외로움, 애정 결핍 같은 이야기가 다루어질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던 것과 달리, 이야기는 주로 다섯째로 태어난 '벤'이라는 남자아이와 어머니 '해리엇' 그리고 다른 가족들 간의 꿈과 파괴, 희망과 실망, 정상과 비정상을 다루는 것으로 대부분 진행된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정상적인' 네 명의 아이들과 달리, '나쁜 유전자가 끼어든 듯' 태어난 다섯째 벤은 해리엇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남다른 고통을 선물하며 해리엇의 증오감을 이끌어낸다.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태아는 뱃속에서부터 해리엇의 적이 되어버렸고, 해리엇은 진정제를 먹으면서까지 그런 괴물 같은 아기와 싸워 이겨 내려한다. 모성애의 대상이 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태아의 분노를 해리엇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독자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약이 자신은 그냥 두고 아기에게, 살아남으려고 투쟁하고 있는 존재인 태아에게만 도달했으면 하고 원했다.
아니나 다를까, 벤은 인간이 아이에게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혐오감을 주기 위해 태어난 아이였다. 갓 태어난 것들을 사랑하는 보통의 아이들과 달리, 벤은 다른 생명들을 억누르고 없애버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기였고,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기보다는 사람들과 싸워이기려는 아기였다. 여리고 말랑한 아기가 아니라, 단단하고 무거운 아기였다. 생김새부터 본질까지, 벤은 사랑받지 못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벤을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족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 기피해야 할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결국 아버지인 데이비드와 친지들은 벤을 요양소에 보내버리지만, 다른 네 아이들의 어머니인 동시에 벤의 어머니이기도 한 해리엇,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해리엇은 모든 상반되는 가치의 가운데에 위치한다. 지리적으로 양 쪽에도 속하지 않는 가운데가 아니라, 양쪽 모두에 몸담고 있는, 그래서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되는 그런 가운데 말이다. 엄마로서 당연히 느껴야 하는(혹은 그래야 한다고 믿어지는) 모성애와, 한 인간으로서 기괴한 생명을 보며 느끼는 혐오감이 부딪히는 물리적인 장소가 바로 해리엇 자신이다. 어찌 보면 이 책에서 벤이라는 인물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벤은 어머니인 해리엇처럼, 꿈을 꾸고 행복하고 싶어 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와 행복한 가정을 상상하며 미소 지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깨물어도 안 아픈 손가락,
차라리 잘렸으면 하지만 차마 자를 수조차 없는 손가락
해리엇은 벤을 낳은 이후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벤을 포기하지도 못한다. 벤이 요양소로 옮겨진 후 잠시 동안 자신이 꿈꾸던 행복한 가족 여행을 하고 평범한 엄마로서 다른 네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벤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 지옥 같은 요양원에서 벤을 구출해온다. 이로 인해 해리엇은 데이비드와 다른 친척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죄인이 되기를 자처한다. 벤이라는 '안 아픈 손가락'을 겨우 잘라낼 수 있는 기회였고 모든 가족들이 암묵적으로 바로 그걸 원했지만, 결국 해리엇은 벤을 잘라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해리엇 자신도 마음속 깊이는 벤이 사라지기를 염원하고 있었지만, 결국 자기 손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엄마니까.
사실 아무리 괴물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엄마는 엄마다. 아이를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해도 지옥에 내버려둔 채 행복하게 살아가지는 못한다. 물론 요즘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죽이고 학대하는, 사람도 아닌 엄마들이 많지만, 최소한 보통의 엄마라면 해리엇과 다른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해리엇이 세상에 바라는 점은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몇몇 말마디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신은 벤이 격세유전했다고 생각하세요?"
길리 박사가 근엄하게 물었다.
(중략)
"난 그런 말을 누가 했으면 하고 원하는 거예요. 난 그런 사실이 인정되기를 원해요.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난 참을 수가 없어요."
결국 진짜 해리엇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린 것은, 벤 자체도 아니고 벤을 낳았다는 죄책감이나 벤을 죽일 기회를 없애버렸다는 것에 대한 소리 없는 비난들도 아니었다. 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자신이 기대했던 바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원했던 말은 바로, '벤은 정상이 아니에요'라며 현상을 인정하는 말, 딱 그 한마디였다. '벤은 지극히 정상의 범위에 있어요', '벤은 노력해요'라는 말들로, 사람들은 벤이 보통의 인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벤이 똑똑하지 않아서, 벤이 아름답지 않아서 해리엇이 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지 않냐는 어처구니없는 반문만 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인들의 억지 시선들은 해리엇을 더 외롭게 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있는 것들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충격적인 상황을 겪거나,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나면 심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범주 안으로 대상을 꾸겨넣어버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비정상 아이, '몽골인'이라고 놀려지는 아이인 에이미는 다운 증후군을 겪고 있다. 특유의 독특한 생김새 때문에 처음에는 에이미의 아버지조차 에이미를 좋아하지 않지만, 결국 에이미는 가족의 일부로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다. 에이미에게는 '다운 증후군'이라는 설명 가능한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김새, 다른 행동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애가 '다운 증후군'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붙일 수 있다. 에이미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들은 에이미를 이해하고 인정한다.
하지만 벤의 경우는 다르다. 벤의 이상한 외모와 잔인한 행동들과 아기로서는 가질 수 없는 괴력 등을 모두가 목격하지만, 가족들은 벤을 보지 않고 회피하는 방식으로, 선생님들과 의사들은 벤을 '정상 범주에 있다'고 서둘러 결론짓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벤이 비정상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에 벤의 비정상적임을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벤의 손을 놓을 수 없는 엄마 해리엇만이, 벤의 유전자가, 벤의 종족이 인간의 그것과는 다름을 직감하고 다른 이들도 이것을 인정하기를 갈구한다. 벤을 고치는 것도, 벤을 교화하는 것도 아닌 단지 벤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인정해달라는 해리엇의 요구는 그렇게나 무리한 바람이었을까?
해리엇은 이러한 벤이, 자신과 데이비드가 행복을 너무나 확신한 것에 대해 신이 내린 벌과 같은 것이라고 얘기한다. 데이비드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행복하려고 했던 그 마음이 오만할 정도로 과해서가 아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흔들리는 책상 위에 카드로 세운 집처럼 언제나 무너지고 흔들릴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넓고 큰 집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을 낳고 매년 친척들과 함께 파티를 하는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소망은, 고작 몇년조차 지속되지 못했다. 그마저도 많은 이들의 금전적인 지원과 배려, 희생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었다. 참으로 위태로운 행복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그리던 커다란 파스텔톤의 그림에 벤이라는 빨간 줄이 느닷없이 그려지자, 모든 그림은 엉망이 되고 모든 이들이 불행해진다.
하지만 불행의 원인이 과연 벤에게만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가 상상한 모습 그대로 미래가 순순히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만약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행복'이라는 그림에 조금만 덜 집착했더라면 어땠을까.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결혼을 하면서 무리를 하면서까지 구입한 '과하게 큰 집'은 바로 이들의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집착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들은 그 집을 사면서, 여러 아이들이 각 방에서 뛰놀고, 매년 손님들이 가족을 찾아와 아이들을 사랑해주고 여러 날씩 묵고 가는, 그런 행복한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구체적인 그림이, 결국 진짜 행복을 해치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상상에 어긋나는 아이 벤이 등장하자 모든 이들이, 심지어 다른 네 남매조차 이 행복한 그림으로부터 도망쳐 나간다. 그림은 색을 잃는다.
그렇게 모든 행복의 색깔들이 떠나가 버리고,
처참한 그림에 남는 것은 기괴한 벤과 펜을 쥔 해리엇뿐이다.
사람들과 아이들로 가득 찰 것만 같았던 큰 집의 수십 개의 방들은 잔인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토록 큰 집에 남은 것은 벤과 해리엇뿐이고, 파티로 북적이며 사랑스러운 웃음이 넘쳤던 시절은 꿈만 같다. 그렇게 행복한 궁전이 될 것만 같았던 큰 집은 파괴된 가정의 흔적이 되어, '행복한 가족'이라는 꿈에 취해 있던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과거를 비웃는다.
해리엇도 데이비드도, 행복한 가족을 위해서는 처음부터 큰 집을 살 것이 아니라 집을 키워나갈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가정에서의 행복이라는 것은, 목표를 정해두고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만들어나가고 키워가는 것임을 알아야 했다.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예외 상황들이, 그림을 망치는 요소가 아니라 새로운 그림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