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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Jun 05. 2016

데미안과 싱클레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통해 고찰하는 나를 찾는 길

명작은 명작이다.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께서 자신은 헤르만 헤세를 너무 좋아해서 그의 책을 모두 읽어버리고도 계속해서 또 읽고는 했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몇 권 들춰보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때도 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재했던 그 시절에는 헤르만 헤세의 책이란 '어린아이에게 내미는 달팽이 요리' 같은 것이었다. 생소하고 어려운데 게다가 달콤하지조차도 않고 먹기도 어려워 보이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마도 그때 몇 장을 꾸역꾸역 읽다가 덮어버렸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제2의 사춘기를 맞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그 어떤 멘토들에게도 들을 수 없는 값진 위로를 주었고, 샘솟는 나의 질문들에 대해 친절히 응답했다. 물론 아직도 많은 부분이 어렵고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그 작은 부분 부분들만으로도 충분히 <데미안>은 나의 '인생 소설'이 되었다.



헤르만 헤세(1877-1962)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면 그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다. 한 가지 놀랐던 사실은, 나로서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 외의 작품은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가 소설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헤르만 헤세는 시인이자 화가였다고도 한다. 예술적 재능이 다방면으로 뛰어났던 모양이다. 나중에 그의 시도 조금 더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구글을 통해 검색해서 나오는 그의 흑백 이미지들은, 비록 젊고 생생하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깊고 반짝이는 눈이 인상적이다.)


헤르만 헤세는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는 당시에 <데미안> 집필을 시작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 책을 출판했다고 한다. 재밌는 점은, 이미 유명한 작가였던 그가 <데미안>만큼은 작품성으로 평가받고자 가명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을 통해 책을 출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다. '에밀 싱클레어'라는 유령 작가는 결국 독일의 문학상인 폰타네 상의 수상자로 지명되는 에피소드도 벌어졌다. 이 사건이 증명한 것은, 헤르만 헤세가 가진 놀라운 통찰력이다. 그는 용감하게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숙명적인 과제와 고민인 '나를 찾는 일'을 <데미안>에서 가감 없이 다룬다. 그리고 그때의 독자들도 지금 내가 느꼈던 속 시원함과 안도감과 위로를 느꼈고, 이러한 위로는 작가의 이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데미안>이라는 작지만 소중한 문장 문장과 이야기들로부터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자주 변하고 불안정할까?

<데미안>은 특히나 요즘 들어 머릿속에서 부쩍 드는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데미안>하면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나 역시도 그랬고, 이 문장은 <데미안>의 핵심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싱클레어를 성장시킨 중요한 두 친구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가 '내가 어떻게 나인가'를 설명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최근 들어서, 이도 저도 아닌 나의 모습을 마주하며 자주 공포감을 느꼈고,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수도 정의하기도 싫은 이 성격에 우울감을 느끼던 찰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깊은 고민에 대해서 수학 공식의 해(解)처럼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싱클레어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다양한 힌트를 주고 올바른 이해의 길로 안내한다.

데미안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는 주로 '알'과 '새'


데미안은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어 가는 일을 자주 하고는 한다. 견진 성사 수업을 들었을 때 한 번, 그리고 나중에 데미안의 방에서 한 번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그 스스로에게 완전히 침잠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현상을 목격한다. 이러한 일들은 데미안이 스스로를 어떻게 다루는 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그는 겉으로 반쯤 그럴듯해 보이는 것보다는, 속으로 완전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그는 지금 이 사회에서는 '금지된 것'그리고 '허용된 것'이 이렇게 저렇게 나뉘지만, 이러한 것들이 언제나 상대적인 것임을 알았다. 그의 말대로, '선'과 '악'이라는 것은 언제나 외부의 재판자가 갈라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는 종이 한 장 보다도 얇은 것이어서 선과 악은 항상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다. 둘은 항상 함께한다. 그래서 데미안은 말한다, 자기는 반드시 자기 스스로의 재판자가 되고, 자기 자신의 편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선과 악이 함께하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그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리고 내 생각에 <데미안>에서 데미안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은 피스토리우스다. 그와 나눈 다양한 대화들은 데미안이 부재한 시기에 싱클레어를 성큼 자라게 하는 양분이 됐고, 동시에 그는 데미안과 거의 같은 주파수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알을 깨야 한다'라는 암묵적인 영혼의 목표를 심어주었다면,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가 진짜 그 알을 깨고 있을 때 조금씩 조금씩 도움을 주고는 했다. 그의 주옥같은 메시지들을 여기에 몇 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늘, 우리가 개인적이라고 구분해 놓은 것, 상이하다고 인식하는 것만 개성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어. (중략)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지만 상당한 재능을 지닌 어린아이 하나만 남는다면, 이 아이는 사물들의 전체 과정을 다시 찾아낼 거야. 그 애가 신이 되어 수호신, 낙원, 계율과 금기, 신약과 구약,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질 수 있을 거야.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를 만들어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돼. 더러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을 나무라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네.
싱클레어, 누군가를 죽이거나 그 어떤 어마어마한 불결한 짓을 저지르고 싶거든, 한순간 생각하게. 그렇게 자네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압락사스라는 것을! 자네가 죽이고 싶어 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 아무개 씨가 아닐세. (중략)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우리가 우리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그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우리 각자가 모든 세계를 자기 자신 속에 가지고 있다'는 이 말이 얼마나 와 닿았고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 내 속에 있는 많은 목소리들과 다양한 의지들이 모두 내 안에 담겨 있는 세계가 외치는 소리들이었다는 설명이 참 좋았다. 우리가 바깥세상에 표출하는 것들, 그리고 바깥세상에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사실상 나 스스로의 내면을 향한다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내가 즐기는 일도, 지루해하는 일도  모두 내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 정말 사실이기 때문이다. 가끔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에게서 발견하는 경우가 아주 많은 것도 한 증거이다. 또한 남들이 '그 사람은 싫어하면 안 돼, 그 일은 즐겨야만 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그저 내면세계에 들어앉아있는 자신의 일부를 좋아하고 싫어할 뿐이다.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계속해서 바뀌는 우리의 불안정한 모습은 오히려 '만화 캐릭터 같은' 것보다 더욱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안의 세계에 담긴 이러한 특성, 저러한 특성이 순서를 바꾸어 가며 계속해서 얼굴을 내민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사람, 틀에 박힌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과 드넓은 세계를 억압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아마도 신 압락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련 없이 그들을 떠나지 않았을까.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데미안>을 읽으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압락사스'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압락시스는 분명히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놓쳐서는 안될 하나의 주제다. 그는 신이자 사탄이다. 알을, 세상을 깨고 나온 새가 날아가는 곳도 압락시스이며,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게 만드는 것도 압락시스이다. 신은 신이고, 사탄은 사탄이라는 틀에 박힌 개념을 가지고 오랜 기간을 살아온 탓인지, '신이자 사탄'이라는 존재는 쉬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특성은 인간의 모습과 닮아있는 듯하다. 끊임없이 변하고, 언제나 이중적인 모습은 우리 스스로 그리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압락사스의 이미지


확실히 <데미안> 속의 싱클레어는 압락사스를 향해 자라난다. 그는 오래된 규범들, 흔히 우리가 선하다고 부르는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성장을 시작한다. 아버지와 착한 누이들, 언제나 평화로운 집에 어울리지 않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괴로워한다. 그때 만난 데미안은 여기에 더해 싱클레어의 종교에 대한 생각까지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아벨을 죽인 형제 카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 예수의 옆에 매달려 회개하지 않은 도둑에 대한 칭찬 등은 싱클레어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당당하게 운명을 받아들이고 개성을 지켜나가는 이들을 '카인의 후예, 카인의 징표를 가진 사람'이라고 칭송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싱클레어는 드디어 반쪽짜리 세계에서 벗어나 세계 전체를 볼 수 있게 된다. 존경받고 성스러운 '신'의 세계에만 억지로 고개를 고정하고 있었던 싱클레어는, 나머지 반의 세계, 악마에게 미루어진 세계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데미안은 말한다.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갈라놓은 세계의 반인 신의 세계만 보지만, 나머지 반의 세계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만 한다고. 그리고 이러한 시선을 통해 우리는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알을 깨는 새는 언제나 압락시스를 향해 날아간다고 한다. 우리가 세계를 깨고, 알에서 깨어나는 이유는 압락시스를 향하기 위함이다. 알 속에서 선하고 착한 규범적 세계에 갇혀 살 수도 있지만,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이러한 세상을 깨고 나온다. 압락시스는 우리로 하여금 운명을 받아들이고, 억지로 감고 있던 한쪽 눈을 뜨게 해주며, 우리 안에 잠겨져 있는 많은 그 무언가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리고 압락사스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조용히 앉아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조용히 지켜본다. 알을 깨고 우리가 날아가는 곳은 저 멀리 바깥 세계가 아니라, 내 안의 더욱 깊숙한 곳, 압락사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   ' .       ,    .   ,     . 



우리는 싱클레어다.
싱클레어의 친구 데미안을, 헤르만 헤세는 우리 모두에게 선물한다.


왜 이제야 읽었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변명 거리는 있다. 권장 도서라고 해서 삶의 어느 시기에나 읽기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책을 만나버리면, 그 책을 적합한 시기에 만나 감명을 받을 기회를 잃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데미안>은 정말 적절할 때 만난 좋은 친구다.


왜 책 이름이 주인공 싱클레어가 아니라 친구 데미안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했는데, 헤르만 헤세는 싱클레어의 성장을 도왔던 친구 데미안처럼 이 책이 모든 독자들이 성장하고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친구 데미안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한다. 싱클레어의 고민을 안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헤르만 헤세가 선물한 친구다. 말 그대로 데미안이다.


물론 여러 번 더 읽어야 하겠지만, 나는 그때를 기대하고 있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이 이야기 속에는 '내면 속의 세계'와 '압락사스'말고도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에바 부인과 베아트리체와 카인의 후예인 사람들이 언제든 말 걸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압락사스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의지에 대한 이야기, 집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전쟁 시기를 겪었고 누구보다도 먼저 자원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려 했던 헤르만 헤세의 이야기들은 내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잠자고 있다가, 필요한 어느 순간 바깥 세계의 대상의 몸을 빌려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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