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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Jun 28. 2016

평범한 사람,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 110쪽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그 분류가 참 애매한 책이다. 분명히 에세이 같은데, 교육 정책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도 하고 자기 계발서 같은 내용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구분들을 다 허물어가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마디 두 마디 이어나간다. '구분'이라는 것에 파묻히기보다는 그렇게 자기 할 말 또박또박해가는 하루키의 태도가 지금의 하루키를 만들었나 보다 싶다.


이 책은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하지만 위인전이나 일기의 형식은 아니다. 친구를 만나 듣는 이야기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바깥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실제로 글 자체가 독자 몇 명을 앞에 두고 소심하지만 또렷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투다. 극단적인 이야기도 없고 엄청난 굴곡도 없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 하나하나에서 하루키가 느껴진다.


하루키의 책을 많이 읽어본 독자는 아니지만, 소설가에 대한 로망과, 소설가가 탄생시키는 그 가상의 인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 것일까에 대한 오랜 궁금함에 책을 집어 들었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덕후'는 아니지만 소설 덕후이고, 하루키의 몇몇 소설을 재밌게 읽었고, 소설가라는 직업에 존경심을 갖고 있는 사람의 자세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책을 사면 항상 겉표지는 떼버린다. 종이 표지를 벗은 하드 커버 디자인이 깔끔하고 일본스러워 맘에 들었다.

몇 장 넘기면서부터, 하루키가 어떤 사람이구나 혹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촉감이 느껴진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하루키만의 몇 가지 말투가 참 재밌다. 친구의 습관을 발견했을 때처럼. 굳이 말투를 분석하려 하지 않아도, 딱딱한 말투가 아닌 편한 실제 말투로 써서 그런지 실제 하루키의 습관이 쉽게 보인다.


'이건 어디까지나', '딱히 ~하려는 건 아닙니다', '~일지도 모릅니다'와 같은 말투들이 내 부하 직원이나 동료의 말투였다면 '어째 이 사람은 말을 애매하게 하네'라고 생각했겠지만, 소설가에 대한 핑크빛 색안경이 끼워져서 그런지 나에게는 하루키가 아주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으로 비쳤다. 오히려 그래서 더 멋지고 친근하고 호감이 갔다. 자기 생각은 분명히 뚜렷하지만 스스로가 분명히 '박학다식'한 사람은 아님을 자각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엄청난 이름값에 실려 타인들에게 의도치 않게 과한 영향을 끼칠까 봐 조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극단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삶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의 길을 멋지게 걷고 있는 하루키 혹은 소설가라는 존재가 더욱 빛났다.


각각 잘하는 분야가 있고 잘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냥 그뿐입니다. 그렇다면 각 세대는 뭔가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각자 잘하는 분야를 척척 전면에 내세우면 됩니다. 자신이 잘하는 언어를 무기로 삼아서 자신의 눈에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자신이 쓰기 쉬운 말로 써나 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세대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도 없고 또한 반대로 묘한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 138쪽


또 한 가지, 하루키의 소설 쓰는 방식이나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경험 등은 사실 내가 생각했던 '위대한 예술가'의 모습과는 솔직히 많이 달랐다. 실제로 예술가들 중에는 미치광이도 많고(귀를 자르거나 자살을 하거나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지금의 나는 가져보지 못한 극단적인 경험(전쟁이나 가정 폭력 등)을 해본 이들도 많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과 성질들이 모여 더욱 현란한 가상 세계를 창조하는 힘을 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내가 그동안 소설가에 대한 거리감을 느낀 부분도, 이런 '예술가'라는 집단에 둘러쳐져 있는 상상 속의 장벽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이러한 집단과는 다소 먼 거리에 있다. 규칙적인 생활, 하루에 한 시간씩은 꼭 달리기를 하는 성실한 모습, 부지런함, 재즈바를 운영하다가 우연히 서른 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경험 등은 사실 내가 생각한 소설가의 극단적인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럼에도 이렇게 꾸준히 35년 간 소설을 쓰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극단적인 사람이 아니어도 성공할 수 있다'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넌지시 건네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성공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라', '나는 이런 방식으로 했고 이렇게 성공했다', '이런 실패를 했고 이렇게 극복했더니 성공하더라', '실패를 두려워말라', '내가 속한 이 직업 사람들은 보통 이렇다'라는 둥의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은 이야기들, 유익한 이야기들이다. 다만 나는 그런 이야기들에서 전혀 위로받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들로 인해 그들은 점점 더 '성공한 사람'의 이미지를 굳혀가고 나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으로 추락해간다. 그들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 가야 할 길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그 또한 나에게는 스트레스가 되어서일까. 성공하기 위해서는 꼭 실패를 겪고, 독특한 경험을 하고, 무언가 철저한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걸까. 이런 생각들로 알게 모르게 벽이 쌓인다.


하지만 하루키는 오히려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거만을 떨지도 않고 자신이 얼마나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인가를 계속해서 표출한다. 자신의 알맹이가 얼마나 작은지, 하지만 그 작은 알맹이가 얼마나 단단했고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굴리며 지금의 자신이 됐는지를 이야기한다. 하루키는 분명히 다른 소설가들과 다르고, 어찌 보면 옆집 아저씨보다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오히려 이런 '작고 별거 아닌 것 같은 평범한' 이야기들이 나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보듬어줬다. 그냥 나 자신으로서 꾸준하고 건강하게, 틀에 갇히지 않고 나의 길을 날아가면 된다, 라는 위로가 (하루키는 말하지 않았지만) 들려왔다. 꼭 튀거나 꼭 독특하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다!라는.


행운이란 말하자면 무료 입장권 같은 것입니다. 그걸 찾아내고 일단 손에 넣으면 그다음은 만사 오케이, 살살 부채질이나 해가며 안일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건 아닙니다. 그 입장권이 있으면 당신은 행사장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그것뿐입니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건네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취하고 혹은 버릴지, 거기서 생기게 될 몇 가지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넘을지...

- 197쪽


그래서 소설가라는 직업과 거의 극단에 서있는 직업인 개발자인 내가, 책을 집어 들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꽤나 재미도 느끼고 위로도 느꼈다. 이렇게 한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거대한 사람도, 나 같은 고민을 하고 나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나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구나 라는 것 자체가, 참 고마웠다. 오밀조밀한 이야기들을 다 읽고 나니, 하루키와 친구가 되어 수다를 떤 기분이었다. 책을 읽고 작가랑 만나서 대화하고 싶어 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책의 제목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절대로 소설가 집단을 대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성공해버린 핑계'를 조심스레 댈 뿐이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든,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든, 한 직업을 오랜 기간 성공적으로 가지고 일해 온 한 삶의 선배의 이야기를 이렇게 듣기 좋은 말투와 읽기 쉬운 단어들로 기분 나쁘지 않게 들을 수 있다는 기회 자체가 행운일 거라고 생각한다. 에세이를 잘 못 읽는 나조차도 단숨에 읽어버릴 만큼 하루키의 생각도 문장의 감촉도 총체적으로 호감 갔다.


다시 한 번,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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