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기 위해 꿈을 꾸는 사람들 - <라임포토스의 배>를 읽고
왜 일을 하나요?
세대 불문하고 소위 '일'이라는 것을 하면서 먹고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혹은 다른 이들과 맥주 한 잔 걸치는 자리에서 화젯거리로 삼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에는 교과서에서도 본 것 같고, 오늘 회사 점심시간에도 토론의 주제로 채택됐던 이야깃거리였다.
아주 적은 수의 행운아들은,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행복하고 살아있는 기분이 듭니다,라고. 그리고 그를 둘러싼 빼곡히 많은 사람들은 피곤한 얼굴에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저 사람 참 얄밉군, 하고 생각하겠지. 그만큼 자아실현이니 진정한 행복 추구니 하는 이유들을 당당하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소수 중에서도 소수다. 아니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사실이 그렇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열심히 해내서 스스로 성공하겠다고 확신을 품고 당당히 입사했던 사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조심스레 내미는 요즘이다.
금전적인 이유야말로, 일을 하는, 아니 '일을 하는 것을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물론 돈이 다는 아니다. 그건 어린 애도 알고(물론 마음으로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3년째 취업 준비하는 청년도 알고 그 청년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머니도 안다. 하지만 어쩌겠나. 돈을 많이 받는 것, 혹은 돈을 많이 버는 기업에 다니는 것이 아니고서야 스스로 오롯이 이 사회에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 말이다. 다른 이들에게 뒤쳐지기 싫어서든, 당장 잠 잘 방세를 내기 위해서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그 돈을 버는 것이 곧 일을 하는 것이라는 등식은 어느 정도 성립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돈 버는 것'을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 대다수의 우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가슴까지 차오른 무거운 일상에 잠겨서 발버둥을 친다. 진이 빠져나가는 그 순간순간에도 우리는 이렇게 잠겨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 번 더 공포감에 휩싸인다. 자꾸만 얼굴로 넘실대는 물살에 이미 지친 몸을 강제로 움직여 헤엄치지만, 그 와중에도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물살과 함께 끊임없이 밀려들어온다.
<라임포토스의 배> 속 그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이 똑같다. 똑같이 즐겁거나 똑같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똑같이 무겁고 힘들다. 책은 두 짧은 이야기로 나뉘어 있다. 두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나이 서른 근처에서 아등바등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여자 회사원들이다. 일을 한 대가로 밥을 못 먹지는 않지만, 결혼하고 애 낳고 남편의 수입에 기대어 사는 여유로운 삶은 먼 나라 얘기다. 여자인 데다가 나이도 찼고 그다지 좋지도 않은 일자리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두 주인공의 자리는, 일과 사람에 지쳐 한 번이라도 무기력해본 사람들의 자리이기도 하다.
우선 <라임포토스의 배> 나가세의 이야기가 먼저 등장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친구 몇만을 만나며 집을 수리할 돈을 모아 오던 나가세가, 우연히 맞닥뜨린 '크루즈 여행' 포스터를 보고 악착같이 돈을 모아 크루즈를 타보겠다고 다짐하는 이야기다. 심지어 그녀는 이미 '생존을 위해' 매일같이 화장품 공장 라인에서 일을 하고, 일을 마치면 데이터 입력 알바를 하거나 친구 요시카의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주말에는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컴퓨터 강의를 한다. 그러던 그녀가 크루즈 여행이라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그녀 스스로도 이 정도 터무니없는 꿈이 아니라면 더 이상 삶을 유지할 힘조차 잃게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도 각박했던 삶을, 1년 연봉 수준의 크루즈 여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더 채찍질한다. 163만 엔. 1년 동안 벌 수 있는 돈이고, 1년 동안 꿈꿀 수 있는 돈이기도 하다. 결국 여차 저차 하여 돈을 다 모으지만, 나는 그녀가 여행을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포토스를 살리기 위해 물을 갈아주듯, 스스로에게도 살아갈 수 있는 물을 갈아주기 위해 크루즈 여행이라는 꿈을 꾼 게 아니었을까.
<12월의 창문>의 쓰가와는, 인쇄 회사 본사에 입사했지만 텃세 심한 지사로 발령을 받은 대졸 신입 사원이다. 그녀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V계장은 언뜻, '무능력한' 그녀를 고용해주는 건 자신들밖에 없다며 배려하는 척하지만 매일같이 쓰가와에게 언어폭력을 일삼는다. 너 같은 건 그만두지도 못한다, 너 같은 무능력한 걸 누가 고용을 하겠냐. 읽는 독자로서 거기에 반항하지 못하는 쓰가와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힘든 취업 활동을 뚫고 어떻게든 입사한 곳이고, V 계장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 않나. 하지만 V계장이 쓰가와에게 모든 탓을 돌린 억울한 누명에, 그리고 어이없게도 본사의 잘못이었던 필름 실종 사건을 겪고 그녀는 사표를 매일같이 품고 다닌다. 도가노 타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상상하는 취미를 가진 쓰가와는 결국 '퇴사'라는 꿈을 실현한다. 사실 <12월의 창문>에는 여러 흥미롭고 미스터리 한 이야기들이 있다. 물론 일본 특유의 담담함으로 묘사되지만. 꽤나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쓰가와는 말한다.
힘내세요. 아니, 너무 힘내지 않도록 힘내세요. 그리고 미안해요. 당신은 그래도 나보다 나을 줄 알았어요. 분명 그렇지 않았던 거죠.
- 190쪽
멋진 영화 속 로맨틱한 명대사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독자들에게 하는 말인 것만 같아 마음 속에 콕 박혀버렸다.
그녀들의 삶이 재밌고 기상천외한 건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이 살아남기 위해 꾸는 꿈들은 더욱 간절하다. 무엇 하나 자기 손으로, 자기 맘대로 하기 힘든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녀들이 가진 꿈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더라도 그 꿈을 비웃을 수는 없다. 그들에게 꿈은 장래희망이라든가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해' 생겨난 까닭이다. 그녀들도,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힘겹게 발버둥 치는 삶이지만 어느덧 정신 차리고 보면 어딘가에는 닿아있지 않을까.
가끔 나가세와 쓰가와의 이야기처럼, 해결책보다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두께와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표지에 담겨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허투루 읽을 만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본문 : http://blog.yes24.com/document/8822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