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또 Aug 23. 2016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이 밝히는 '무기력'의 진실

우울증과 무기력함
혹은 과도하게 포장된 행동들.

나를 포함한 많은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회사를 다닌 지 이제 갓 2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나는 스스로를 마주할 시간을 조금씩이나마 늘려가고 있다. 사실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곰곰이 살펴보니 나라는 존재는 내가 그러리라고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가치가 적은 것으로 들통났다. 단체의 일원으로서든 오롯한 개인으로서든,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지나, 실제로 그 속에 속해있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는 인생의 목표와도 같은 입사의 관문까지 지나오고 나니 허무감은 당연히 느껴진다. 그렇게 많은 길을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는데, 결국 달려오고 나니 남는 것은 지친 영혼과 그걸 달랠 강인한 자아조차도 부재한 '나'였다. 꼬박꼬박 들어와 감사했던 월급조차 익숙해지고 나니, 이 월급이 나의 '과거에 대한 친절한 보상'이 아니라 충실히 회사의 한 일원으로서 기능을 다하라는 '미래에 대한 압박'과 같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함께한다, 라는 말도 참 좋으면서도 위험한 말이다.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항상 누군가들과 함께였기에 즐거운 추억들은 많이 남기는 했는데.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 쓸모 있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하는 말들과 생각들을 들여다보니, 진짜 나의 뇌가 만들어낸 창의적인 의견이 아니라, 어디선가 들었던 말들을 그냥 되풀이할 뿐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함께라는 것이, 온전한 나로서 다른 이들과 한 공간에서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함께'라는 것에 녹이고 그 함께를 나처럼 투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적으로는 무기력해지고 움직임은 과해졌다.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스스로를 바쁜 스케줄로 괴롭혔다. 그럼으로써 나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만은 않았던 듯싶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그렇게 외적인 압박으로 무언가를 이루지 않고서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절대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무기력해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만나게 됐다. 사실, 아무래도 철학적인 이야기가 가득해서 그다지 읽기 쉽다고는 말 못 하겠다. 절대로 독자에게 친절한 투는 아니다. 같은 장을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얇고, 마치 타로점을 보는 것 마냥 하나하나 내 얘기인 것만 같아 힘겹게나마 다음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신이 무기력한 이유는 '남이 바라는 나'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용감하게도 나의, 우리의 치부를 드러낸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나도, 즐겁게 여행을 다니는 나도, 사교 활동을 좋아하는 나도 사실 진짜 나가 아님을 말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우리는 평등의 개념을 사회에 잘못 적용했다. 차별받지 않고 개인의 자유 의지를 표현하는 평등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아지는' 평등을 우리도 모르게 추구하고 있다.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할 것 같은 모습 그대로를 나에게 투영하고, 그게 진짜 나라고 생각하며, 정말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를 서로에게 투영하면서 '잘못된 평등'을 계속해서 되풀이해간다.


요즘 돌아보면, 사람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감정'이라는 것에 기반한다고 느껴진다. 동물들은 강한 자에게 당연히 고개를 숙이며, 먹을 수 있는 것이 눈 앞에 등장하면 망설임 없이 입을 댄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강한 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약한 자를 보며 강한 자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으며, 아무리 눈 앞에 먹을 것이 있다고 해도 먹기에 부적절한 상황이라면 먹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느낄 때' 비로소 진짜 '나'가 된다.


에리히 프롬도 같은 이야기를 주장한다. 우리는 감탄하는 법을 잊었다. 그저 이성적으로, 지성적으로 세상을 판단하려고만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인간이 아닌 기계와도 같은 존재가 된다. 나무를 보면 그저 '이것은 나무다'라고 판단하고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으며, 완두콩이 굴러가는 것은 당연한 논리라고 생각하며 굴러가는 완두콩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단지 아이들의 행동 양식만이, 진짜 인간으로서, 무기력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처럼 세상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놀라워하고, 눈길을 주는 것이야말로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판단하기 이전에 경험하고, 분류하기 이전에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나다.


그리고 진짜 나를 되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기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역동적인 삶의 물결 위에서 그 울렁임을 느끼고 맛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등한 것처럼 보이고 똑똑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넓어지고 연결 고리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개성을 잃어가고 암묵적인 '동일화의 압박'에 짓눌린다. 평등이라는 사상은 점차 균일화라는 무기로 뒤바뀌어 개인들의 외양은 물론이고 생각과 사상, 스스로에 대한 인식조차도 바꾸어 놓는다.


개인들은 이러한 균일화된 단체 속에서, 자신의 의미와 경제적 가치, 기능적 가치를 찾으려 하지만,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찾은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역시 우리들의 고질적인 무기력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반응하는 나 자신을 빼고는, 사실상 우리의 모든 생각은 이미 누군가로 인해 심어진 생각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과 접점을 찾아서 정리한 내용들이지만, 아마도 모든 독자들에게 와 닿는 문장들이 서로 다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나로서는 나의 얕은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나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기 위한 시도를 해볼 용기를 찾는데도 도움을 얻었다. 철학이나 심리학은 원래 정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던져주고 스스로를 깊이 살펴볼 기회를 준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의미 있는 학문이니 말이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가지고 싶은 것을 갖는 데 쏟는다. 그런 행동의 전제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묻지 않는다. 전제 조건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싶고, 어른이 되어서는 성공의 사다리에 더 높이 오르고 싶고,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싶고, 더 좋은 차를 사고 여행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한 번씩 이런 악착핱은 노력을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차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은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려 노력한다. 그런 의문으로 괴로운 것은 그저 피곤하거나 기분이 울적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원래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목표를 계속해서 좇아간다.

- 100쪽,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발버둥 치는 삶이라도 어딘가로는 향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