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순위 여행 준비물, 음악
4월에 들어섰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갈 바르셀로나 여행을 준비 중이다. 이것저것 준비할 것들도 많고, 일정이니 예산이니 정리할 것도 많다. 아무래도 부모님을 모시고 가이드 아닌 가이드 역할을 하게 돼서 그런지, '정리'의 압박이 적지 않다. 여행은 준비할 때가 제일 재밌다고는 해도, 도무지 정리하는 성격이 되지는 못해서 방학 마지막 날 밀린 숙제를 하는 듯한 기분으로 머릿속에만 있던 계획들을 정리하려 애쓰고 있다.
나에게는 한 가지 여행 습관이 있는데, '여행지에 맞는 노래 골라가기(및 듣기)'이다.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가끔 밤길을 걸을 때 이어폰을 꽂고 감성적인 음악을 듣고는 하는데, 기분이 말랑말랑해지니 참 좋다. 하물며 처음 가보는 여행지들, 피곤한 기억도 익숙한 냄새도 묻어있지 않은 그곳에서는 그 말랑말랑함이 어떠하겠는가. 게다가, 지금이 아니면 다시 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는 곳이다. 아무 음악이나 들으면서 그곳을 떠올릴 수는 없지. 그래서 평소에 꽂히는 음악이 있으면, 이 음악은 이런 곳에서 들으면 좋겠다 하고 여행을 상상하곤 한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어디에서 무엇을 들었다' 가 마치 사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사실 여행지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면, 사진 한 장만큼의 기억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 이상의 감정은 되살아나지를 못한다. 그리고 사진은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나는 분명 그 아름다운 나라, 그 자유로운 도시의 한 명의 낭만적인 여행객이었는데, 사진을 보면 나는 그냥 추레하고 후줄근한 수백 명의 여행자들 중 한 명일 뿐이다.
하지만 음악은 다르다.(만세!) 여행지에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그때의 기분, 냄새, 온도, 장면들이 하나의 온전한 기억으로 되살아 난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나는 한 명의 영화 주인공이 된다. 그때의 내 모습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때의 내가 느꼈던 것들은 음악과 함께 고스란히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내가 몇 곳 되지 않는 여행지들에서나마 들었었던 기억 속에 길이길이 남을 나만의 여행 배경음악들, 그리고 언젠가는 여행지에서 들어보리라 다짐하고 있는 음악을 몇 개 소개하려고 한다.
정확히는, 오사카 우메다 공중 정원의 꼭대기 아래층 카페 옆 바깥이 보이는 유리창 앞자리, 계단인지 인테리어 때문인지 머리 위에 뭔가 있어서 쭈그리고 앉아서, 밖에서 사 온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공중정원 관람 마감 시간 근처에 이 음악을 들으며 야경을 봤다. 다양한 버전의 Cry me a river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Julie London에 의해 처음 유명해졌다고 한다. LP판 튀기는 느낌, 늘어진 테이프 소리 같은 느낌이 나는 음악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재즈, 특히 비 오는 밤에 어울린다. 단출한 반주에, 방금까지도 울고 있다가 억지로 무대로 올라 노래를 부르는 듯한 처량한 Julie London의 목소리가 특히 좋다.
제목에 river가 들어가서 뭔가 강이 보이는 곳에서 들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단순 무식한 생각을 했었지만, 도통 오사카의 도톤보리 같은 곳에서 듣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고, 조용하고 어둡고 bar 느낌이 나는 곳에서 야경을 볼 때 들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오사카 우메다 공중정원에 방문했다가 좋은 곳을 찾아서 듣고야 말았다. 너무 편하고 좋은 곳에서 듣기보단 조금 불편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쭈그리고 듣는 것을 추천한다. 처량 처량.
최근 재개봉했을 때 본 것을 포함해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3번 정도 봤다. 전체로 본 것만. 피아노 배틀 장면만 치면 어림잡아 수십 번은 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처음 피아노 배틀 장면에서 너무 큰 감명을 받아서 피아노 배틀 장면 피아노 악보를 뽑아다가 다 잊어버린 피아노를 뚱뚱 거리며 어떻게든 완곡해보려고 노력해서 결국 해냈던 기억도 난다(그래 봐야 지금은 단 1도 못 친다). 게다가 학교에서도 피아노 배틀이 일종의 센세이션이었어서, 나만 저런 가상한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오히려 위의 사진들과 같은 장면들이었다. 노을 지는 강, 고백과 입맞춤, 두 주인공의 따뜻한 만남들. 그리고 샤오위가 등장하는 장면들에서의 OST들. 피아노 배틀 장면이 강렬하고 자극적인 불닭볶음면 같은 곡이라면, Lu Xiao Yu, The Swan, Xiao Yu Xie Li Ke Bai 세 곡은 추운 날 심야 식당에 들어가 시린 손을 녹이며 먹는 따뜻한 미소 라멘 같은 느낌이랄까(하지만 나는 아직 불닭볶음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재작년쯤 혼자 떠난 대만 여행에서 가장 기다리며 가장 설레는 마음을 안고 떠난 곳이 바로 단수이였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이자, 노을 지는 단수이 강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타이베이의 도심도 좋았지만, 쌀쌀한 여행 날 해가 질 때쯤 버블티를 들고 찾은 단수이 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OST들과 함께 나는 샤오위가 되었다.
이번 여행을 포함해, 바르셀로나는 사실 두 번째 방문이다. 첫 번째 방문 때는, 구글맵이 아니라 종이 지도를 뽑아 들고 길을 찾아다니며 말이 안 통해도 구글 번역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때고, 휴대폰 배터리 때문에 음악 듣는 것 따위는 꿈도 못 꿨었다. 게다가 적은 예산을 가지고 떠났던 배낭여행이었어서, 매우 고생스러웠던 기억도 좋은 기억만큼이나 많이 남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다행스럽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만큼 발로 걸어 다니며 대강의 지리를 몸으로 익혔었기에 어떤 곳이 어떤 인상이었는지를 알고 좋은 배경 음악을 선정할 수 있으니까.
바르셀로나 하면 가우디나 분수쇼나 하는 것들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나는 특히 좋았던 것이 포트벨이었다. 정확히는 넓게 트인 카탈루냐 광장에서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과 끼 있는 익살꾼들이 넘치는 람블라스 거리를 지나 만나게 되는 그 포트벨이 좋다. 당장이라도 신대륙을 찾으러 떠나려는 듯 하얀 배들이 줄지어 서 있고, 쨍쨍하고 새파란 하늘 밑에서 신식 건물과 구식 건물들이 함께 나란히 서있다. 한국에서 바다를 떠올리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해수욕장이나 모래들이 생각이 나는데, 포트벨은 왠지 모르게 공항이 생각이 난다. 여유라는 단어보다는 설렘, 출발, 기다림 이런 느낌들이 더 걸맞은 곳이다.
Priscilla Ahn의 Fine On The Outside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추억의 마니>라는 영화의 OST다. 영화관을 자주 찾는 나는 영화 예고편 배경으로 나오는 이 음악에 어느 순간 홀려버렸다. 정작 영화는 못 봤지만, 예고편에서나마 추억이나 기다림이라는 키워드가 포함되는 영화인 걸로 보였고, 호수에서 예쁜 금발 여자 아이와 짧은 머리의 소년 같은 여자 아이가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아마도 짧은 머리가 금발 머리를 추억하고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듯한 이야기로 보였다. (아니면 죄송합니다)
그래서, 포트벨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마냥 이 음악을 들어보고 싶어 졌다.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는 못하지만, 드뷔시 월광이나 라 캄파넬라, 베토벤 2번 교향곡 등. 몇 개 좋아하는 클래식 곡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드뷔시 월광은 신비롭고, 몽환적인데, 강렬하다.
유우니 사막의 밤 사진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압도적인 느낌. 다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고 내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 마냥 소금 사막에 서서 하늘을 보고 드뷔시 월광을 들어보고 싶다. 왠지 실현 불가능한 상상인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이므로 내 맘대로다.
여행은 가서, 보고, 오기만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다. 듣기든, 먹기든, 찍기든 무엇이든 더 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야 한다. 누군가는 여행에 가서 무언가를 묻고 오고, 누군가는 여행에 다녀오면서 추억이 될 만한 것들을 사 오고, 누군가는 음식으로 그곳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사진으로 그곳을 떠올린다. 나에게는 그것이 음악이고, 앞으로도 여행과 음악은, 적어도 나한테는 떨어질 수 없는 최고의 궁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