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Arrival, 2016)을 보고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
영화는 '미래에 대한 지금 우리의 생각(혹은 희망)'을 담기 마련이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아니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바람, 절망, 생각이 자연스레 스며든다.
로봇과 기계에 대한 지식이 태동하기 시작할 때 SF 즉 공상 과학(Science Fiction)이라는 장르 역시 태동했다. 관람객들은 영화가 주는 미래에 대한 오감적 자극을 즐겨왔다. 그리고, 근 십수 년간은 기계와 로봇에 대한 궁금증을 넘어 '외계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SF물의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일은 굉장히 고통스럽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달 2일에 개봉하는 <컨택트>(Arrival)은 이런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수백만 가지 답변 중 하나를 조심스레 선보인다. <컨택트>는 장담컨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유니크한 SF물이다.
인간 중심적인 외계인 SF물
분명 외계인이 등장하고 알 수 없는 12개의 외계 비행체들로 인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나오는 관객들은 외계인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과학적 기술보다는 평범한 '언어'에 대해, 수천 년의 시간보다는 '한 사람의 짧은 생의 시간'에 대해 더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러한 점이 이 영화를 독특하게 만드는 조용한 반전이 아닐까 싶었다.
압도되다
내가 정말 몇 안되게 '압도'됐던 영화 중에 두 영화가 바로 <컨택트>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작품들이었다. <시카리오>와 <프리즈너스> 감독이 <컨택트> 감독과 동일 인물임을 알고 나니 영화관을 나오는 내 발걸음이 왜 그렇게도 무겁고 힘들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다양한 영화감독들이 있는 만큼, 그들이 관객들에게 영화라는 것을 선보이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드니 빌뇌브 감독은 (비록 이번 영화가 세 번째지만, 감히 평가하자면) 대사보다는 영상과 음악으로 말하는 감독이다. 웅장한 영상과 무거운 음악, 친절하지 않은 스토리는 다소 관객들을 힘들게 하곤 한다.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해주지만, 절대 친절하거나 수다스럽지 않기 때문이랄까.
그만큼 여운이 짙다. 아직도 <시카리오>와 <프리즈너스> 그리고 <컨택트>를 생각하자면,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무거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호불호가 꽤나 갈릴 스타일이지만, 어쨌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극단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감독은 관람객들을 상대로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툭하니 던진다. 12개의 외계 비행체를 지구 위에 띄워둔 채로. 유치하지 않게, 가볍지 않게, 그렇다고 뻔하지는 않은 방식으로 묻는다. 그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을지는 관객의 몫이다. 어쩌면 그의 질문은, 그 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관객인 우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길 바라는 목적의, 철학적 질문일 수도 있다.
WHY ARE THEY HERE?
그들은 왜 여기에 왔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아내야 하는가?
시간과 인간
아무래도 <컨택트>의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컨택트> 속의 시간은 우리가 아는 그것과 다르게 흘러간다. 영화의 시작이었던 부분이 사실은 영화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었으며, 루이스에게 자꾸만 스쳐 지나가는 '딸에 대한 과거의 기억'은 사실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미래'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시점에 엮이고 뒤죽박죽 되면서 루이스는 점차 혼란에 빠진다.
<컨택트> 속의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 없다. 마치 동그라미처럼. 이러한 설정은 (1) 헵타 포드가 사용하는 언어가 선형이 아닌 원형이라는 점, (2) 루이스의 미래 딸 이름이 거꾸로 읽어도 같은 이름이 되는 한나라는 점(HANNAH), (3) 영화 초반에 루이스가 'We are so bound by time…by its order'라고 말하는 점과 같은 복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래의 기억', '벌어지지 않은 과거'는 루이스를 혼란에 빠뜨리지만, 관객들에게는 시간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당연한 태도를 상기시킨다. 루이스의 말대로, 우리는 온전히 시간에 묶여있다. 물리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인간의 시간은 대부분의 경우(루이스와 같은 케이스가 아닌 이상) 선형으로 흘러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현재를 즐기지 못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 때문에,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현재를 올바로 보지 못하고 느껴야 할 것들을 느끼지 못한다. 선형적인 시간에 메인 자는 마땅히 지금 당장만을 보고 살기도 바빠야 할 것임에도,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고 바꿀 수 있는 것에는 무관심하게 살곤 한다.
단편적으로, 영화 내의 루이스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외계 비행체가 미래에 지구에 가져올 종말을 두려워하며 현재 그들과의 관계의 희망, 가능성은 눈뜨고도 보지 못한다. 그저 비행체들을 격파하고 외계인들을 몰살하려 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헵타 포드들과의 소통을 통해 그들의 진심을 이해하고 현재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고 이런 인간의 태도를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며, 준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재가 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우리는 시간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할 뿐이다.
미래를 모두 알게 된 루이스는 그 반대를 경험한다. 지구에 가져올 평화를 위한 힌트를 미래로부터 얻어와 현재에 그대로 실행한다. 전인류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런 행동은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가 본 것은 긍정적인 것뿐만은 아니었다. 이안과의 결혼이 이별과 딸의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을 것을 알지만, 현재의 선택을 바꾸지 못한다.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하는 꼴이다. 이안이 '만약 당신이 미래를 모두 알게 된다면 현재를 바꾸겠냐'는 루이스의 질문에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으로 맞받아치는 장면, 그리고 결국 사랑하게 되는 둘의 모습은, 별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가끔 내가 미래를 알 수 있다면 현재를 적극적으로 바꾸며 더 심리적으로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안을 끌어안는 루이스의 눈동자는 '편안함'이나 '안심'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고 현재를 사는 것은 그렇게나 쓸쓸한 것일까. (나중에 이안에게 루이스는 자신이 미래를 본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 때문에 이안이 떠난다는 설정이 있는 걸로 봐서,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은 곧 두려움과 불화의 원인이 되나 보다)
미래의 슬픔을 알고도 현재를 바꾸지 않는(혹은 바꾸지 못하는) 루이스의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
만남과 언어
<컨택트>에서 또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외계 존재와 그들의 공간에 대한 묘사였다. 보통 SF물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상당히 인간과 유사한 모습을 띄고 굉장히 공격적, 지저분한 행동을 통해 불쾌감을 주고는 했다. 물론 연기하기에도, 관객들이 이해하기에도 그러한 설정이 더욱 편리한 설정임은 인정한다. 하지만 최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런 설정은 정말 말이 안 되는, 비현실에 비현실을 더하는 연출이라는 것이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기를 쓰고 노력하고 있는 우주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구로 도착한, 과학적으로 매우 발전된 존재들일 것이다. 지구 정복을 위해 왔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탐사적 목적이 더 강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인터스텔라>나 <마션>에서 행성에 발을 처음 디디는 존재는 당연히 '과학자'들일 거라고 우리도 상상하지 않는가. 최소한 전쟁을 치르러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여튼 이러한 이유로 그동안의 외계인이 등장하는 SF 물을 보며 약간의 불만을 가져왔고, <컨택트>를 보면서도 혹시 그런 '우주 전쟁'이 등장하지 않을까 내심 노심초사했다. 다행스럽게도 <컨택트>는 제목 그대로 인간과 외계인의 '접촉(만남)'과 '소통'을 소재로 하는 영화였으며 심장과 귀를 폭행하는 공격적인 분위기가 아닌, 소통하려는 외계인과 소통하려는 루이스의 만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또 흥미로웠던 것은, 헵타포드들을 만나는 공간이다. 영화를 본 후에도 왠지 이 공간이(위의 사진) 자궁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김새로 보나, 의미적으로 보나 그렇다. 무중력의 공간을 지나 열리는 넓은 방,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인간들을 강제로 밀어내며 '출산'하는 공간.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인간의 공간과 헵타포드들의 공간이 만나는 곳. 그곳에서 루이스는 다른 이들과 달리 거리낌 없이 보호복을 벗고 맨 몸이 되며 미래를 볼 수 있고 헵타 포드들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난다.
루이스가 헵타포드와 교류하는 과정은, 만남이란 이렇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첫째로 나를 보여주고, 둘째로 상대를 궁금해하며, 셋째로 질문을 하는 것. 다른 11개의 외계 비행체에서는 어떤 식으로 헵타포드들과 소통했는지 모르겠지만, 언어학자로서의 루이스는 언어가 왜 생겼고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자녀에게 언어를 가르치듯 헵타포드들에게 소통하는 법을 가르쳤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스스로를 드러내고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역으로 그들에게 역시 이름을 붙이고 개개의 외계인들을 존중했다. 진짜 만남은 '인간 두 명과과 외계인 두 명'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루이스, 이안과 애벗, 코스텔로'가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다음이 언어였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며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는 외계 비행체를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고 매우 두려워했지만, 루이스는 그들을 믿고 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무기를 들고 보호복을 입은 채 비행체에 접근했지만, 루이스는 맨 몸으로 화이트보드 하나를 든 채로 비행체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러한 소통을 향한 의지와 그들의 말을 이해하고자 하는 루이스의 태도가 수십 명의 과학, 수학자들이 투입되고서도 난관에 봉착했던 헵타포드어 분석 프로젝트가 큰 한 발짝을 내딛도록 했다.
꼭 이 헵타포드들이 외계인이어야만 이 이야기가 성립할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인디언들을 처음 본 미국인들처럼, 몇몇 국가들은 헵타포드들을 없애고 죽이는 것이 (그것이 가능하다면) 옳다고 생각했고 실행에까지 옮겼다. 헵타포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항상 새로운 문명을 만날 때마다 이해는커녕 문명을 없애고 약탈해왔다. 겁이 많은 우리 인간은 새로운 것은 꼭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습성이 있나 보다 싶다.
옳지 않은 일이다. 헵타포드들과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그에 따라 당연히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들과 접촉할 용기와 인내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생김새도 사는 곳도 다른 외계인임에도 말이다.
헵타포드들이 머무는 뿌연 안갯속처럼, 종종 우리는 명확히 알 수가 없고 의문스러운 것들을 만나며, 만나게 될 것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다. 하지만 헵타포드를 대하는 루이스처럼, 그들과 진짜 '만나기' 위한 노력은 쓸데없는 스트레스와 희생을 피하고, 좀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