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 슬로운>을 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로비스트라는 직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로비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인정하지도, 아니 그 직업 자체를 합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일까.
로비스트에 대한 정의부터 내리자면, 그들은 특정 단체의 이익을 위하여 정당이나 의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설득하고자 노력하는, 좋은 말로는 '섭외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도 합법적으로 인정만 안됐고 겉으로만 드러나지 않을 뿐 수많은 로비스트들, 로비스트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거의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정치의 무대는 숭고하지 않다. 가장 멋지고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똑똑하고 거룩한 말들을 쏟아내며, 나라와 국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높은 지위만큼이나 추락하고 더럽고 타락한 모습들이 존재한다. 로비스트들은 그 위와 아래를 오가며 의원들과 정당들이 좀 더 오래 그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만한 결정을 내리도록 설득한다.
로비스트 역시 굳이 선과 악을 나누자면 '선'의 편에 있는 직업은 아닐 것이다. 결국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손해가 필요한 법이다. 로비스트들은 그 이익을 얻는 편에 서는 자들이다.
직업적으로는 그러하다. 정치판이 지옥이라면, 로비스트는 그 지옥에서도 가장 달콤한 꿀을 찾아다니는 악마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속 미스 슬로운 역시, 그러한 악마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녀의 진한 화장 속에는 커리어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 커리어를 위해 포기해야 했던 삶, 다른 이들이 생각지 못할 것들을 누구보다 먼저 잡아내기 위해 정신없이 돌아가는 머리, 권력가들 사이의 관계, 부하 직원들에 대한 의심과 조금의 믿음 등이 있다.
어쩌면 그녀는 여자도, 인간도 아닌 그저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새로운 종의 생명과 같다. 그런 그녀에게는 감정이나 공감 능력, 쓸데없는 허례허식, 심지어는 성욕조차도 그저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그녀의 삶은 마치 모든 것이 TODO 리스트에 적혀있는 삶만 같다. 혹은 먹이를 노리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고 다가가 단번에 숨통을 끊어내는 짐승의 삶에 더욱 비슷하다.
하지만 왠지 그녀의 삶에서 나는 쾌감을 느꼈다. 나에게는 불가능한, 그녀의 추진력과 판단력, 철저함, 한 번 정한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몰아붙이는 능력,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이미 끝을 볼 수 있는 통찰력. 화려함.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총기 규제'를 강력히 주장하는 그녀의 비밀스러움. 그리고 믿음직스러운 리더십.
그녀는 분명 악마지만, 우리 모두가 내면에 한 번쯤은 '이렇게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인물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는 사실 그녀의 삶을 자세히 혹은 감정을 가지고 비추지 않는다. 미스 슬로운이라는 인물이 그런 것처럼 적당히 숨기고 적당히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영화 속 인물들은 물론이고 관객들은 그녀가 이끌고 내치는 대로 정신없이 따라다니기 바쁘다. 탄탄한 스토리와 아름다운 제시카 챠스테인의 새로운 매력,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 빼어난 연기력, 듣고 싶지 않지만 들을 수밖에 없는 지저분한 지옥, 정치라는 배경은 이 영화를 미스 슬로운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