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는 날에는 나는 치악산으로 간다(2)

-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람들-치악산 비로봉(시루봉)

by 갈대의 철학

눈이 내리는 날에는 나는 치악산으로 간다(2)

-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람들-치악산 비로봉(시루봉)

시. 갈대의 철학


치악 비로봉 오르는 길은 비단 눈꽃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가을 단풍 보다도 겨울 단풍을 좋아하는 그대이다 보니

예전에 늘 가던 그 길을 배회하다 시 피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대가 거기 있을 거라 막연한 사연을 싣고

오고 가는 어쩌다 마주치는 눈동자가 그대인가 싶으면

산에 올라 힘들기도 하지만

고개 숙여 걷고 오르다 보니 문득 힘든 한 고개를 넘나들었구나 싶어

문득 고개을 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 앞에서는 그대와 비슷한 옷차림에

하얗게 웃어주며 말 한마디 건네주는 이가 있어

예전에 치악 향로봉에서 그렇게 세차게 휘몰아치던

눈보라 속에서 헤매던 그때 모습과 구별되었습니다


하얗게 웃음 지우며 의례 인사를 건네주던 이가

그대 일리가 없었을 거라 생각되었지만

혹시나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지나치는 객손이 그대라는 막연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기 사슴이 무엇엔가 흠칫 놀란 가슴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대가 그토록 바라던 겨울 눈꽃을 바라볼 때였던 것을 보면

그 가슴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랬었습니다


멍하니 두 눈 글썽이며 먼 하늘을 바라다볼 때의 모습이

그날의 아름다운 기억들로 눈앞에 선하게 다가오는 것에

또 한 번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언뜻 찾을 길 찾아올 길 없는 마음을

바람 부는 시루봉 언덕에 남겨두고

비로봉에 올라서서 먼 하늘을 바라았습니다


그대는 온 데 간데없고 푸른 하늘 위를 드리운 그대를 또 기다려봅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방은 온통 몹쓸 바람 앞에

찬기운과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끄떡도 하지 않은

눈꽃만이 예전에 그대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눈꽃이 있어 그대가 있는 것이 아니요

그대가 있어 또한 눈꽃이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눈꽃도 꽃이요

상고대가 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대의 눈물이 녹아 만들어진 수정이랍니다


눈꽃이 그대의 화사한 웃음이 아니면 어때요

상고대가 그대 눈물이 아니면 어때요.

그대 거기 있어준 기억의 저편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대 대신할 눈꽃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대 내게 있어 기다려 달라는 것은 죽음과도 같아요


칼바람이 살을 에이듯이 와도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 하지는 못하답니다


너무 추워서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오르니

입에서 내뿜어져 나오는 입김은

어느새 얼굴에 새하얀 눈꽃처럼 다시 피어오릅니다


한 올 한 올 눈꽃이 맺힐 때처럼 피고 지고 사라지는

나는 어느새 하얀 눈꽃이 되어갑니다

콧등의 시림도 내게 함께 찾아오는 것이 부자연스러워할때도 있지만

차가움은 곧 고드름이 되어

그대가 이별할 때 건네준 말 한마디에 비수로 꽂혀서 다가옵니다


언덕을 오르는 것은

그대의 진실을 논하기 위해서도 아니랍니다.

오를 때마다 숨이 차는 것이

그대와 내가 정상에 오르기 예전의 카타르시스의 느낌과도 같아요


송골송골 이마에 땀방울이 이슬 맺히듯이 하는 것이

정상에 올랐을 때처럼

기분은

느낌은

공감은

아직도 살아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느낌이지만

그날 그대와의 못다 이룬 정열에 태열을 다 태우지 못한

아쉬움의 여력이 남아있기도 하답니다


그대 알아요

어느새 등떼기 언저리 전해져 오는 뜨거움이

금세 식어버린 것은 시루봉 정상에서 맞이하는 칼바람도

이겨내리라는 것에 자부심마저 드는 이유를


나의 이마에서 수정된 고드름이 녹아

다시 이슬 맺히듯 녹아 눈물이 되어 가는 것도

그대 뺨에 젖어 화장한 얼굴과 함께 얼룩져 갑니다


나는 그곳에서 그대를 기다리며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커피를 따르는 중입니다

지금 정상에서의 찬바람은

그대와 내가 돌아올 수 없는 강물보다

더 춥고 매섭답니다


이내 커피는 매서운 기운과 함께 녹아내려

그대의 차디차게 식어버린 마음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얼기 직전에 그대와 지난날의 마지막 키스가

닿는 느낌으로 영혼 없는 키스보다 더 차고

얼음나라 궁전에 와 있는 느낌을 느낍니다


그곳에서 그대를 기다린다는 것은

더 이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매너를 잊어달라 하며

손은 곧 동상이 시린 듯 아파옵니다


그대를 대신해줄 푸른 하늘 아래 하얀 햇살에 빛나는

하얀 설원의 눈꽃만이

그날의 기억을 보듬을 수 있고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요



눈이 나리는 날에는 나는

하얀 눈꽃이 피는 겨울 적악산으로 떠납니다

그곳은 그대의 품속처럼 하얀 마음을 지닌

어머니 품속과 닮았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나는

하얀 설원의 이국적인 풍취가

물씬 베어 나오는 하얀 치악산으로 떠납니다


그곳은 다가울 봄에 대한 아련한 배려쯤은 아주 익숙한

이미 추운 겨울을 외면한 지 오래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이 겨울이 떠나가는 길목에 서서

마지막 추운 겨울에 남겨둔 그대의 희미한 잔상들을 떠올리며

다가올 봄을 잉태할 준비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겨울 떠나고

그대 그곳에 머물려

이듬해 다시 발길 찾아 돌릴 때에는

그렇게 모질게 불어왔던 가시덤불 숲 속을

또다시 걸어가려 합니다.


2017.1.22.치악산 비로봉 가는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