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와 반라
- 전라와 반라
詩. 갈대의 철학
겨울 산은 부끄러운 줄 모른다
겨울에 태어나 산고의 잉태를 품고
봄에 새싹이 돋을 때면 해산의 준비를 마치며
또 다른 잉태의 봄을 가슴에 품는다
여름에는 신록의 옷을 입혀 주고
세발 걸음 질에 달음박질 치면
금세 불은 개울가 저편에는 개구쟁이들의
물방개 헤엄쳐 거닐고
풀벌레 매미소리 자지러질 때쯤이면
밤하늘 별똥별 잔치가 무르익어 가고
어느새 달무리 짙게 드리우는 근심하는 맘을 저버릴 길 없구나
가을에는 오색 칠색 단풍으로 수놓으니
그리운 님 색동저고리에 옷고름 맵시있게 매듭짓고 나서는 마음이야 마실인 듯 어떠하랴
철따라 입혀 온 형형색색 옷감 물들여 가면
어느새 가을은 다시 반라의 겨울 채비를 나서니 말이다
겨울이 오는 봄의 전령사를 맞이하는 마음이야
마지막 몸짓의 전라 된 나신으로 다가선다지만
이 겨울을 어서 가라고 재촉한다고 한들
길 잃은 나그네를 유혹하고 현혹시키기에 바쁜
너의 서두르는 마음 앞에 충분한 여력이 없을 듯 보이는 것이 애달프구나
오고 갈데없는 고사 목아
지나가는 객손이 부러워 바람이 불어오기까지
기다리려 하느냐
님의 목소리 전달해 달라 해 놓고선
산 천하의 신들에게
어찌 말 못 할 사연을 전해 달라고 하느냐
어느 하나 가릴 곳이 없는
네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를 말아다오
오랜 인고의 세월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버터 왔는지
나그네의 마음을 지녀왔기에
내 심히 아는 바는 아니지만
기꺼이 나를 반기면 네 말벗을 해드릴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지나가다 잠시 머물다 쉬어가는 객이 되려오
춘하추동 철마다 계절의 옷도 입지 못하고
어느 누구 하나 입혀주는 이 없구나
반가운 이 찾는 이 없어도 뒤 아름다운 설 운의 배경을 마다하고
그저 삶의 한 부분인 너의 옷자락인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초가산간 처마 밑이 되어버린 까마귀의 울부짖는 소리가 그리울 따름이라네
낙락장송의 고운 자태가 아니어도
바람이 불어 그 높은 자태에 있어도
뽐냄이 없는 너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도 말며
기다리는 이 없고 찾아오는 이가 없어도
항상 굿 굿하게 우뚝 솟은 너의 기운은
가히 천하를 호령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계곡이 눈으로 덮이고 숙면에 들어갔다
그러나 밑에서 꿈틀대는 너는
눈부신 몸부림에 하얀 순백의 이 겨울의 설화보다 아름답고 고귀하다
눈부신 나체는
더욱더 이 겨울의 마지막 몸부림의 쇠사슬을 끊으라 하니
다가올 산수화의 노란 마음을 달가워하지도 말며 부끄러워하지도 말아다오
떠나올 때 몰랐지만
네가 항상 그곳을 지키며 서있는 것은
나의 바램도 아니오
더 더구나 빛나던 태양의 마음을 담는 것도 아니라네
말없이 지켜보고 웃음 건네주며
길 잃은 자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잠자는 이의 수호신이 되어주며
밤의 신령들의 영혼을 깨우는
이 겨울의 마지막의 수문장이 되어
곧
나와 그대의 빗장을 지켜주며 열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