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대신 책을 고른 이유
아기가 잠들고 나면 엄마의 생활이 시작된다.
엄마의 생활은 설거지하기, 청소하기, 빨래 돌리기 3종 세트로 이루어진 집안일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마저도 하다가 선생님이 부르시면, 하던 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곁에 누워있어야 한다.
운 좋게 그 모든 일을 다 끝냈는데도 아직 주무신다면, 이제 비로소 '나'의 생활이 시작된다.
일단 눕는다.
그리고 손에는 폰을 든다.
유머 글 몇 개, 핫딜 정보글 몇 개, 프로필 사진 변화를 구경하다 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다 날아가버린다.
어느새 또 하루가 지나간다.
이게 과연 내가 원한 삶일까?
생일 선물을 챙겨주며 아기 물건 말고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사라던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나는 결국 립스틱 대신 책을 골랐다.
10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받았기에, 10만 원어치 책을 사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갑자기 어떻게 책이 떠올랐을까?
책을 고른 건, 아이에게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나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어쩌면 아이를 위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지금의 '나'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조금씩 자각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아이를 위한 선택 같지만 결국 나를 위한 길이 되었다.
때마침 뉴스에서 고위직 공무원, 대기업 회장 등이 선호한다는 국제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와, 멋지다. 나도 우리 아기 저런 학교 보내고 싶다. 어떻게 보내지? 일단 부자가 되어야겠다.'
생각의 흐름은 이렇게 이어져 알라딘 홈페이지에서 재테크, 경제경영 분류의 베스트셀러를 훑으며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5권의 책을 골라 주문을 하고 나서 왠지 모르게 다시 태어난 듯이 에너지가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시작하는 사람의 기대감과 설렘 덕분이었으리라.
그날 이후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낮잠 시간 10분, 밤잠 시간 20분, 아주 짧은 조각 시간들을 모아가며 읽었다.
나름의 독서교육이라고 생각하며 아이가 혼자 잘 놀고 있을 때는 일부러 보란 듯이 아이 앞에서도 읽곤 했다.
처음엔 눈에 잘 안 들어왔고, 읽다가 졸기도 했다.
또 무슨 말인지 머리에 잘 안 들어와서 중요하다 싶은 부분은 다 옮겨 적으며 읽었다.
진도는 느리게 나갔지만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책은, 아이가 아닌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이의 성장이 아닌 나의 성장을.
아이 뒤로 감춰뒀던 나의 욕망을 꺼내보게 해 주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다시 나를 마주했다.
엄마로만 존재하던 내 일상 속에서, 사람으로서의 내가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
그 고요한 틈 사이에 책을 읽고 사유하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고 따뜻한 자유였다.
립스틱 대신 책을 고른 이유는 어쩌면, 내가 여전히 나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은 나에게 말한다.
"너 아직 충분히 빛나. 잠시 가려졌을 뿐이야."
나는 오늘도 책 한 권을 곁에 두고, 가만히 나를 다시 불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