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일정은 누가 다 짰을까

매주 수요일 연재 | 브런치북: 가족여행의 기술

by 늘보나무

여행 중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에 머무르다 보니, 예정된 발행 시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출국 한 달 전, 어느 저녁.
여동생이 미국 여행 일정을 두고 잔뜩 의욕을 불태우자, 남동생이 딱 잘라 말했다.
"너, 지난번처럼 진짜 짜지 마라."
그 짧고 단호한 경고를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엔 전설처럼 남아 있는 그들의 터키 여행이 떠올랐다.


[터키 소금호수 전설]

"2년 전 여름, 터키 가족 여행 중이던 한 여성은 블로그에서 본 새하얀 소금호수 사진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그녀는 그 풍경을 보러 가자며 가족들을 설득했지요. 결국 그들은 렌터카를 타고 먼 길을 나섰어요. 장장 세 시간을 달려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건 기대했던 ‘순백의 호수’와 그 위에 반사된 하늘이 아니었어요. 진흙이 드러난 웅덩이와 그 위로 떠오른 소금 거품이었어요. 가족들은 그만 분통이 터져서 그녀를 혼내주었어요."


전설의 교훈이 이번 미국 여행엔 통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다시 여행의 첫 장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Day 1. 출국의 밤

출국 5시간 전, 우리는 호기롭게 공항에 도착했다. 여유롭게 면세 쇼핑도 하고, 라운지에서 든든하게 먹고, 비행기엔 산뜻한 얼굴로 올라타자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땐 우리가 아주 '현명한 여행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라운지였다. 처음엔 ‘무료 맥주 한 잔’이었는데, 그게 ‘시원하네’로 이어졌고, 곧바로 “위스키도 있다는데?”라는 위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다음은… 말해 뭐 하랴. 나, 남편, 여동생. 삼인 삼색 위스키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고이 준비한 면세 쇼핑 리스트는 그렇게 서서히 취기 속으로 사라져 갔다.
정신 차렸을 땐, 탑승 마감 시간이 다 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저 인터넷 면세품만 부여잡은 채 비행기에 올랐다.



Day 2. 공항 직원의 미소

아버지께서는 장거리 비행에 대비해 수면제를 드셨을 뿐이라고 했다. 긴 비행시간을 자면서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약이 체질에 맞지 않았는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어지러움을 호소하다 결국 낯선 도시의 화장실에서 속을 비워내셨다. 겨우 안정을 되찾으셨지만 다른 항공편 승객들까지 모두 빠져나간 뒤야 우린 마지막으로 입국심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 사이 우리의 캐리어는 컨베이어 벨트 옆에 무리 지어 세워져 있었고, 무표정한 공항 직원이 말없이 그것들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그 직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Day 3. 늦잠 연대기

아침 11시에 시작하려던 일정은,
우리 셋이 아침 11시에 깨어남으로써 물 건너가 버렸다. 시차에 완패한 나와 남편, 딸은 먼저 일어난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준비를 서둘렀지만 결국 숙소를 나선 건 오후 1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허겁지겁 달려간 애플파크와 구글 비지터 센터는 정보보다 기념품이 더 많은 '현대적인 상점’이었다. 서로에게서 실망한 기색을 읽어내는 눈치 게임을 하다 아쉬움만 사고 나왔다.

급히 남은 시간을 탈탈 털어 스탠퍼드대 아트센터로 향했다. 폐관 30분 전, 헐레벌떡 들어가 겨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앞에 도달. 나머지 작품들엔 눈도장만 찍고 직원 눈치를 보며 출구 찾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트센터를 더 일찍 올 걸...'

비로소 우리는 진정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전설의 교훈이 통했냐고요?
글쎄요. 일정은 단 한 번도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죠.
결국 우리를 구해낸 건,
썰렁한 농담들과 조금 유난스러운 웃음소리.
지키기에만 집중하면, 함께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예정] 3화- 그 많던 운전은 누가 다 했을까



매주 수요일 오전 7시,

'가족여행의 기술'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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