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늙었어

브런치북 <책상 앞의 선생님> | 화요일 연재

by 늘보나무

인터넷 강의를 신청했더니 엄청난 분량의 학습 자료가 도착했다. 훑어보니 여러 개론서와 수험서를 요약한 것으로, 이것만 보면 따로 정리 노트를 만들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오, 이걸 반복해서 보면 되는 것인가.’
그렇게 조금씩 읽어나갔지만, 글씨가 너무 작았다. 놓친 내용 없이 잘 구조화된 좋은 자료임엔 틀림없었다. 그런데 몇 번을 더 시도해도 눈이 시려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노안인가? 젊은 친구들은 과연 이게 잘 보일까?’
급히 수험생 카페에 들어가 검색하니 역시나,
‘다들 OOO 강사님 자료 어떻게 보시나요?’
‘전 확대 복사해서 봅니다.’
등의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참고 볼만하단 평이었고, 나처럼 포기까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나는 몇 번 더 눈물을 흘린 뒤 조용히 자료를 넣었다. 조금 서글픈 생각이 스쳤다.
‘배움이란 게 나이로 멈추는 걸까?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신문 기사만 봐도 평생학습의 시대다.
‘50대 이상 행정사 자격증 응시자, 역대 최대 기록.’
퇴직 후 새로운 직종에 도전하는 사람, 60대에도 공인중개사나 사회복지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도 많았다. 누군가는 노후 대비를 위해, 누군가는 단순히 “아직도 배울 게 많아서”라고 말했다.
더 이상 공부는 젊은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하다 보면, 버리지 못한 습관들이 내 나이를 일깨운다. 사실 교사 시절에도 그랬다. 신세대인 학생들은 교과서 대신 패드를 꺼내고, 필기구 대신 손끝으로 화면을 움직였다. 당시엔 속으로 생각했었다.
‘이게 정말 공부가 될까?’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방식으로 공부해야 하는 내가 있다. 패드에 자료를 띄워두고, 화면을 분할해 문제를 풀며 여전히 불안감을 치지 못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않으면 범위 내용을 빠뜨릴 것 같고, 반복 회독하지 않으면 외워지지 않을 것 같다.
내게 공부란 늘 책을 정독하고, 주요 내용을 손글씨로 노트에 옮긴 뒤 그걸 반복해서 읽는 일이었다. 그게 ‘공부의 정석’이자 ‘성실함의 증거’라 믿었다. 그래서 다시 그 방식으로 시작했다.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요약 노트를 만들며.
그런데 문제를 풀다 보니 깨달았다. 출제 경향은 훨씬 복잡해졌고, 문제는 단순 암기가 아니라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예전엔 정직하게 외우고 이해한 사람이 유리했다면, 이젠 빠르게 구조를 파악하고 패턴을 읽는 사람이 앞선다. 세상은 ‘정공법’보다 ‘유연성’을 요구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전의 공부법은 성실했지만, 지금의 공부는 전략적이어야 했다. 그 변화 앞에서 한동안 꽤 헤맸다.
‘나는 여전히 주입식 공부에 안심하는 구세대인가,
아니면 사고력을 발휘할 줄 아는 수험생인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는 결국 시대의 거울이 아닐까. 지식을 쌓는 방식이 달라지는 건, 세상이 변했다는 신호다. 익숙한 펜 대신 패드를 쥔 내 손이 조금 어색하지만, 그만큼 내가 여전히 배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나도 학생들에게 주입식 수업을 하지 않으려 얼마나 애써왔던가.
단순 암기를 묻지 않고, 사고를 끌어내는 문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었던가.


나이 들어 다시 배우는 일의 본질은, 결국 겸손인 것 같다. 예전엔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고, 누군가의 질문에 답을 주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묻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정답을 말하던 사람이 다시 질문을 배우는 중이다.
어른이 되고, 교사가 되고, 부모가 된 뒤로는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직접 꾸중을 듣는 건 아니지만, 내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고쳐보려 애쓰는 시간이 이상하게 반갑다.
그 낯선 감정이, 오래 잊고 있던 배움의 온도처럼 느껴진다.


공부가 인생을 바꾸는 건 아니다. 다만 나를 여전히 움직이게 하는 일 중 하나일 뿐이다.
누군가는 운동으로, 누군가는 사람 사이에서, 또 누군가는 책 속에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는다. 나에게는 그게 우연히 공부였던 것뿐이다.
다만…

세상이 너무나 빨리 변해서 문제다.
익숙해질 만하면, 또 새로운 게 줄을 서 있다.



다음 주는 시험을 앞두고 잠시 쉬어가려 합니다.
그동안 쌓아온 만큼, 최선을 다하고 오겠습니다.

11월 25일 화요일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