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했는데, 마음은 아직 달린다

욕봤다, 늘보나무

by 늘보나무

달려온 뒤의 숨은 홀가분하면서도 허전하다.


D-7

갑자기, 더는 보지 않을 학습 자료들이 시야에 밟혔다. 책장 앞으로 가서 하나씩 꺼내 펼쳐보다가, 모의고사 답지 묶음에서 손길이 멈췄다. 깨알같이 적힌 풀이 과정, 색펜으로 고쳐둔 오답, 형광펜 자국.
“아, 이걸 이렇게 했었지…”
내 안 어딘가에 고여 있던 바다가 다시 출렁였다.
묘하게 졸업식 날과 비슷했다. 잘 가라 보내야 하는데, 도무지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마음.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는 없겠지…'
알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 감정.
공부도, 학생도, 나의 지난날도 어딘가로 흘러가버리는 느낌.

D-day
시험날 아침 공기는 언제나 특별하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고, 그동안의 모든 시간은 오늘을 위한 길처럼 느껴진다. 붉은 카펫이 깔린 것도 아닌데, 분명 발밑 어딘가가 반짝이는 기분.
그런데 실제 무대에 올라서자, 그 열기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1교시 종이 울리자마자 손이 덜덜 떨려 몇 번이나 글씨를 멈췄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펜을 쥐고, 또 멈추고.
‘이건 풀 수 있겠다’와 ‘이 문제는 해도 너무했다’가 번갈아 등장하며 나를 시험했다.
어느 순간, 세상은 사라지고 문제와 나만 남아 있었다. 초침은 쏜살같이 흘렀고, 준비해온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소모됐다.
시험은 그렇게 끝났다.
길었던 건 과정이었다.


D+1
예상치 못한 감정이 나를 찾아왔다.
허망함.
공부가 끝났으니 자유가 올 줄 알았다. 밀린 드라마도 보고, 운동도 하고, 커피도 천천히 마시고, 아이와도 오래 놀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그날이 오니… 아무것도 재미가 없었다. 놀면 불안하고, 쉬면 죄책감이 들고, 멍하니 있어도 ‘뭔가 해야 하는데?’가 계속 따라왔다. 한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긴장이 사라지자 줄이 끊어진 풍선처럼 마음이 붕 떠버렸다.

시험을 잘 봤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시험이 나를 증명하지는 않지만,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건 사실이라는 것.
공부로 인생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살면서 오래 기억할 순간 하나는 남겨준 듯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욕봤다, 늘보나무. 정말 고생 많았다.”

누구는 점수로 나를 평가하겠지만 나는 이 시간을 나의 언어로 기억해 둘 생각이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스친 이 허망함까지도.
그래서 나는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그냥 멈춰 있기에는 마음이 어지러워서.


그리고,
이 문장들을 쓰기 시작했다.


길게 돌아온 공부의 계절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보나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