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나는 행복이와 뛰어놀았다.
이른 아침 2시간, 그리고 해 질 무렵 또 2시간.
반려견 놀이터에서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고, 마음껏 뛰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행복했다.
나는 개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보다 개가 더 좋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웃지만,
그건 결코 웃자고 한 말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마음을 포장하지 않으며,
언제나 눈빛 그대로, 몸짓 그대로 반응한다.
그런 존재와 함께 있을 때면,
나 역시 굳이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로 있어도 괜찮은 순간.
그게 나에게는 개와 함께 있는 시간이다.
언젠가 동료 교사가 내게 물었다.
“사람이랑 더 어울려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개로 태어났어야 해요.”
그 말엔 농담도 있었지만,
조용한 진심도 함께 묻어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바라고, 받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어떤 감정을 주게 될지,
어떤 태도로 그 관계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나는 타인을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그 안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과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그걸 내가 감히 정의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듣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보다 그 사이의 맥락을 보고,
눈빛과 행동 속에 담긴 결을 읽는다.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존중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판단당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기준으로 나를 규정지어지는 일,
내 존재의 깊이를 단순화시키는 일이란
참으로 불편한 감각이다.
나는 하나의 장면이나 말, 상황으로 쉽게 파악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나의 태도를 정돈하려 한다.
신중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게 자연스럽게 선택해 온 나만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개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 시간 안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어떤 말을 하지 않았는지 따지지 않는다.
그저 지금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감각만으로 충분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조심했던 마음,
혹시라도 상처가 될까 더듬으며 내뱉었던 말,
그 모든 걸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시간.
그래서 개와 함께하는 순간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내가 나를 회복하는 ‘존재의 쉼표’다.
나는 조용히 살아왔다.
말보다는 마음으로,
기대보다는 책임으로,
주장보다는 태도로 사람 곁에 머물렀다.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가 누구인지를 꼭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고,
스스로를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진심은 어딘가에서 전해진다고 믿는다.
그런 삶이 외롭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외로운 건,
‘나로 있어도 되는 곳’이 없을 때다.
그러나 나에겐,
언제든 달려가 안길 수 있는
정직한 눈빛을 가진 행복이라는 친구가 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
그 존재와 함께일 때,
나는 조심하지 않아도 되고,
조용히 나로 있어도 된다.
그 순간이,
내가 가장 나다운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행복이와 있을 때, 나는 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