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는 순간, 겹쳐진 시간

by 늘람

출근길에 오른 아침, 운전석 너머로 햇살이 흘렀다.

여름 특유의 짙은 열기가 아스팔트 위로 피어올랐고,

그 위를 따라 늘어선 시골길 풍경은 창밖을 스쳐갔다.

녹음은 무르익었고, 작은 집들의 지붕 위에는

아직 밤의 습기를 덜어내지 못한 듯 희미한 윤기가 남아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세계의 무거운 소식이 흘러나왔다.

트럼프와 젤렌스키, 휴전과 전쟁, 협상과 갈등.

멀리 떨어진 나라의 이야기임에도,

도로 위의 열기와 뒤섞여 묘하게 현실적인 울림을 주었다.


그러다 문득, 밑도 끝도 없이 '우크라이나에 여행을 가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지금 이 시국에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머릿속은 그 나라의 이름에 빠져들었다.

마치 어린 시절 지도를 펼쳐놓고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들에 막연히 선을 그어보던 순간처럼.

현실성은 없었지만, 상상은 이미 한 발 먼저 그곳을 향해 있었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 전체가 전쟁터는 아닐 것이고

아마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아침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는 길을 걸으며,

누군가는 평화로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폐허 속에서도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

그 질긴 삶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즈음, 도로 위의 뜨거운 기운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여름의 열기가 아니었다.

젊은 날의, 막연했던 시절의, 설명하기 힘든 어떤 감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감각은 그리움보다는

막연함이라던가, 아득함이라던가 하는 감정에 가까웠다.

열기 가득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내리쬐는

여름날의 강한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늘어진 채 서있는 듯한 느낌.


그 시절의 나는 늘 어딘가로 가고 싶어 했다.

막연히 기다리는 듯하면서도 늘 도망치고 싶어 했다.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떠나는 행위 자체가 전부였다.

지금 도로 위에서 느껴진 그 열기는

바로 그때의 막연함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나는 여전히 같은 몸을 가지고 있고,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같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떤 순간에 그 변화가 일어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강물이 언제부터인가 다른 강이 되어버린 것처럼,

같지만 같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흘러간다고 하지만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겠고,

지나갔다고 하지만 지금 이렇게 다시 느껴지기도 한다.


과거라는 것이 정말 과거에만 존재하는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라면,

중심에서 시작된 파동이 점점 넓어지면서 먼 곳까지 도달하지만,

동시에 그 중심은 여전히 진동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젊은 날의 그 충동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것이고,

지금의 나는 그 진동이 만든 파문 위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여행 충동을 느끼는 나와 젊은 날의 열기를 느끼는 나.

시간의 간격은 있지만,

그 근본적인 무엇인가는 변하지 않은 채 계속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원초적 충동,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근본적 갈망.

그것은 나이를 먹어도, 책임이 생겨도, 현실적이 되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정말 같을까.

젊은 날의 떠남과 지금의 떠남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때의 떠남이 무엇인가를 향해 가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떠남은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행위지만 저변에 깔린 감정은 다른 것 같다.

변치 않은 건 어쨌든 떠나고 싶다는 그 충동뿐이다.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전쟁과 평화를 오갔고,

도로 위에는 차량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흘러갔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다른 풍경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본 적도 없는 우크라이나의 거리를 걷는 상상,

젊은 날의 무작정 떠나던 마음,

그리고 지금의 나를 덮친 여름의 열기.

세 겹의 시간이 한데 뒤엉키며,

나는 잠시 낯선 나를 마주했다.


불편하면서도 반가웠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안의 무엇인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변하지 않은 나인지,

아니면 변해버린 나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일까?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뭐 어차피 인간도 적외선이라는 빛은 내기도 하고,

원자들로 이루어진 물질이기도 하니까.

빛도 물질도 결국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까...'라고.


삶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변하면서도 무엇인가는 변하지 않고,

완전히 달라졌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어딘가에는 예전의 모습이 남아있는 것.


마치 강물이 계속 흘러가면서도 강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도 계속 흘러가면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으로 남아있는 것.


그 순간을 지나 다시 일상의 운전으로 돌아왔다.

마음 한켠은 여전히 그 경험의 여운을 간직한 채로.


오후 내내 수업을 하면서도,

그리고 퇴근하며 운전을 하면서도,

그 낯선 감각은 미묘하게 남아있었다.

꿈에서 깬 후에도 하루 종일 꿈속을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어쩌면 이런 순간들이 우리 삶의 가장 소중한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드물게 찾아와 스치고, 곧 사라져 버리지만, 그 자취는 길게 남긴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모여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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