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그 다음날

by 늘람

아침 6시.

행복이의 분주한 움직임 소리와
까뮈의 덜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평일이면 이 시간에
행복이와 까뮈가 아침 식사를 한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그 시간에 나를 깨우는 듯했다.


일어나자마자
행복이와 까뮈의 밥을 챙겨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라떼의 약을 먹였다.


그리고 지난밤 라떼가 먹은 식사량과
배변 상태를 확인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매번 확인하는 순간에는
항상 걱정이 앞선다.


모처럼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책을 조금 읽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오늘 읽은 책은
‘망하지 않는 책을 쓰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책이었다.

평소라면 아마 읽지 않았을 책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30분가량 책장을 넘기며 읽어보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적인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책은
내게는 맞지 않는 책이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아마도 나는 누군가 알려주는 쉬운 길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가 보다.


책을 덮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아마 그런 방법으로 쓰는 글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그리고 동물병원이 문을 여는
아침 10시에 맞춰

아내와 함께

라떼와 행복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행복이는 여전히 사람을 좋아한다.


의사 선생님을 보면 아는 척을 하고,
간호사 선생님에게도 꼬리를 흔든다.

심지어 미용하는 실장님에게도

먼저 인사를 한다.


주사는 조금 피하려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착하게 잘 이겨낸다.


그래서 행복이는 병원 식구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라떼는 아픈 일을 겪은 뒤라
건강 상태를 한 번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피검사를 했다.


예전보다 훨씬 얌전해졌다.

피도 잘 뽑고

발톱을 정리하는 시간에도 얌전히 참아줬다.
그래서, 오늘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병원을 다녀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테라스 정리를 시작했다.

빼놓았던 창고의 짐들을 모두 치웠지만

이젠 테라스에 묻은 겨울의 흔적을 치워야 한다.


사실 시작할 때는 막막했다.

화분도 많고

쌓여 있는 물건들도 많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잠깐 서서 바라보다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화분을 옮기고
필요 없는 것들을 정리하고
버릴 것들을 모아 밖으로 내놓고
쌓여 있던 물건들을 다시 배치했다.


아침 11시에 시작한 정리가

오후 5시가 되서야 끝났다.

혼자서 여섯 시간을 정리한 셈이다.


몸은 꽤 피곤했다.

하지만 공간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정리하기 전보다 훨씬 넓어졌고,

꽃눈이 맺힌 매화와 라일락,

그리고 삐죽히 잎을 내보내는 수선화는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줬다.


행복이는 오늘 예방접종을 했기 때문에
산책을 가지 못했다.

대신 정리가 끝난 넓어진 테라스에서

후각놀이를 조금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터그놀이도 했다.

30분 정도의 시간,

넓어진 공간은

행복이에게 보다 나은 만족감을 선물했다.


나는 지금
그 테라스를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다.


공간이 정리되면
이상하게 마음도 정리된다.


어쩌면 그건
공간이 넓어져서가 아닌,

그 안에 쌓여 있던

시간들이 비워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물건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순간의 흔적이다.


언젠가 쓰겠다고 남겨둔 가능성,
이미 지나가 버린 선택,
그리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


그것들이 하나씩 사라지자
넓어진 테라스와 함께
길어진 하루의 호흡이

내게 찾아온 듯 했다.


몸은 조금 피곤하지만
기분은 무척 상쾌하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글을 쓰면서
내가 기분이 좋은 또 다른 이유 하나.


어제 올린
‘하루’라는 글에서의 바램처럼

나는 오늘

책도 읽었고
글도 쓰고 있다.


어제 한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좀 더 행복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오늘 하루를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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