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엔트로피

by 늘람

기억은 정직하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약한 자극 하나에도 부드럽게 변형된다.


같은 일을 겪었어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기억을 품는다.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중심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그리고 해석은 언제나

지금의 감정에 기울어진다.


흐릿한 기억이 오래간다.

명확하지 않아서 무너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아서 잊히지도 않는다.


사라지지 않지만,

머물지도 않는 감정의 파편.

그것이 남는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말하지 못한 말,

설명하지 못한 표정,

끝내 닿지 못한 마음들이

흐릿하게 흩어진다.

그 흩어짐이 흐름이 되고,

흐름은 다시 내 안의 조용한 결이 된다.


닫힌 계에서 질서는 무너지고,

에너지는 고르게 퍼진다.

처음의 구조는 흐려지고,

방향은 사라진다.

감정도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처음에는 분명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날 웃었다고

지금도 웃고 있는 건 아니고,

그날 울었다고

지금도 불행하고 슬픈 것은 아니다.


기억은 같은 장면을 다른 모양으로 꺼내 쓴다.

무엇을 버틸 수 있는지,

무엇을 더는 꺼낼 수 없는지에 따라,

그 모양은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잃는 게 아니다.

다만, 감당 가능한 방식으로 재배치할 뿐이다.

기억은 지금의 나를 기준으로 정렬되고, 그 감정이 기억을 다시 쓴다.


누군가는 그 장면에서 떠나는 뒷모습만 기억하고,

누군가는 끝내 돌아보지 않은 눈동자만 기억한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았다.


종종 누군가 내게,

왜 그 일을 그렇게 기억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종종 같은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 질문에는

언제나 답이 없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감정의 궤도에 따라 움직인다.


무너지지 않는 기억도 있고, 순간에 사라지는 기억도 있다.

어떤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형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어떤 날은, 아주 작은 냄새 하나에,

오래 전의 장면이 아무 말 없이 되돌아온다.


그 장면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은 또렷하다.

그 또렷함이 다시 기억을 만든다.

그 기억이 또 하나의 나를 만든다.


기억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돌아오기도 하고,

비켜가기도 하고,

멈춰 서기도 한다.


모든 질서는 무너진다.

기억도 역시 엔트로피다.


한 번 정리된 기억은

다시 정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조용히 품는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에,

때로는 방향을 바꾼 바람처럼,

내 하루를 흔들고,

잠시 멈추게 한다.


기억은 흩어지면서도

다시 모인다.

모순이지만,

잊으려 할수록 남고,

붙잡으려 할수록 흐른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말은 사라져도,

그 말이 남긴 진동은

그대로다.

장면은 잊혀도,

그때의 결은 남는다.

그 결이

지금의 나를 움직인다.


나는 여전히 내 안의 흐트러짐 속에서 한 조각의 중심을 향해,

조용히 걸어간다.


그 모든 흩어진 감정의 총합.

그것이 나다.

그것이 기억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말없이 살아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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