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새벽 세 시, 시계의 초침이 아직 조용한 시간에 눈을 떴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둠이 방안을 감싸고 있었지만, 작은 숨소리 하나는 또렷했다.
행복이. 늘 그렇듯, 아내의 등 뒤에 붙어 있었다.
아내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마치 자석처럼 스르르 그 곁으로 이동한다.
어느새 아내의 베개를 반쯤 차지하고는, 사람인 듯 누워 있었다.
그러다 아내의 목소리가 터졌다. "저리 가!"
그 외침은 경고였고, 동시에 어떤 생명에게는 초대였다.
행복이는 그 소리를 놀이 시간이 시작됐다는 신호로 이해한 것 같다.
새벽의 고요함은 그 작은 생명의 발걸음으로 깨졌다.
이리저리 튀어 오르고, 구석구석을 돌며,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흥분했다.
나는 이내 다시 잠드는 것을 포기했다.
다섯 시가 되어, 옷을 챙겨 입고 행복이와 산책을 나섰다.
새벽의 공기는 말보다 빠르다.
말 한마디 없이도, 차가운 공기와 습한 바람은 내 감정을 먼저 꿰뚫고 지나갔다.
행복이는 익숙한 길을 알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앞서 나가고, 때론 내 옆에서 속도를 맞추기도 했다.
새벽 공기 입자를 콧속에 품으며 움직이는 그 모습은 마치 파동이 주변을 관통하며 간섭무늬를 만들어내듯, 공간과 교감하는 듯했다.
'많이 편해졌구나.' 그걸 느끼는 순간, 한편으로는 고마웠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나는 왜 늘 미안한 걸까.
매일 산책을 나가지 못해서?
하루의 피곤함을 이유로, 네가 바라보는 눈빛을 모른 척해서?
하지만 나는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마음속에선 항상 '미안함'이라는 이름이 고개들 든다.
행복이는 산책 중엔 대소변을 보지 않는다.
소변조차도 아주 조금, 어쩌면 긴장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조용히 멈춰 서더니 대변을 보았다.
그 조용한 사건 하나가 어쩐지 참 좋았다.
"그래, 이제 너도 이 길을 너의 길로 받아들였구나."
몸은 커졌고, 발걸음은 안정되었고, 이제는 낯선 길에서도 마음을 여는구나.
감정은 입자의 속성이 아니라 파동의 성질에 가깝다.
언제나 중첩되고, 한 가지 감정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내 안의 미안함도 그렇다.
사랑, 책임, 후회, 피로, 이해받지 못함이 겹쳐 파동처럼 진동한다.
그리고 새벽의 정적이나 행복이의 시선 같은 조건이 충족되면, 파동은 붕괴되어 하나의 감정으로 관측된다.
오늘은 그 감정이 '미안함'으로 났다.
그렇지만 그 ‘미안함’ 내 감정의 전부는 아니다.
왜 나는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이렇게 오래 품고 살아가는 걸까.
사실, 이 미안함은 행복이에게만 드는 감정이 아니다.
행복이와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언제나 미안했다.
어머니에게, 늘 더 좋은 아들이 되지 못해 미안했고,
아내에게, 내 곁에서 무뎌져 가는 감정의 언어들에 대해 미안했고,
아이들에게, 내 피로가 그들의 눈빛을 외면하게 만든 날들에 대해,
그리고 학교에선 학생들에게, 내가 아닌 나로 수업에 서 있던 어떤 날들에 대해.
그 미안함은 단지 하지 못한 일들의 목록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그 자체에 가까웠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제한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는 감정적 회로.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자기 검열은 아니다.
더 깊은 곳에서는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윤리적 감수성에서 시작된다.
나는 누군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때로는 너무 조심한 나머지, 나 자신을 지우고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이 쌓이면서, 미안함은 감정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존재는 언제나 타자와의 접촉으로 열리며, 그 접촉은 결코 닫히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너무 오래 열린 채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파장을,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구조.
그 구조 안에서 나는 항상 한 발 늦게 반응하고, 더 많이 느끼고, 그래서 늘 미안했다.
사랑해서 미안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음에도 모자람을 자각할 때, 그때 비로소 미안함은 감정 이상의 구조가 된다.
마치 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만드는 것처럼, 내 마음의 구조를 미세하게 비틀어놓는다.
미안함은 나의 감정이 아니라, 나의 시공간적 구조다.
그 감정은 나를 조정하고, 나를 붙잡고,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감정은 일종의 비가역적 에너지 흐름이기도 하다.
한 번 흐르고 나면 되돌릴 수 없고, 이전 상태로 복귀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의 손실은 마치 열역학적 계 안의 엔트로피처럼 쌓이고, 우리는 그 손실 속에서 더욱 복잡해진 감정 구조를 품게 된다.
그래서 미안함은 단지 현재의 감정이 아니라, 누적된 시간의 비대칭성이 만든 구조다.
오늘, 행복이 덕분에 그 감정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나는 그 오래된 질문과 다시 마주했다.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날, 나는 더 조용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오늘의 미안함도 내 안에 하나의 곡률로 저장된다.
아주 작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을 울림으로.
그리고 문득 떠오른다. 행복이가 오늘 처음으로 산책 도중 대변을 본 그 순간이.
그 조용하고 소박한 사건 하나가 내 안의 고인 감정을 물처럼 흐르게 한다.
그건 어떤 확신이다.
서툴지만,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음과,
완전하지 않아도, 서로의 길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음을.
처음으로 외부 자극에 의해 파동함수가 붕괴되어 위치를 결정짓는 입자처럼,
그 존재가 공간 안에 자신을 투사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행복이의 대변은 단지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행복이가 이 공간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은밀한 선언이었다.
그 작고 단단한 흔적 앞에서, 나는 오늘 하루를 다르게 시작한다.
내 미안함이 언젠가 온기로 환원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