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아~ 라떼는 말이야~
고양이 라떼는 매일 세 번씩 전쟁을 치른다.
상대는 행복이.
나와 함께 걷고, 함께 밥을 먹고, 때로는 침대 위를 점령하기도 하는 강아지다.
그리고, 라떼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굴러 들어온 돌멩이다.
둘은 한 지붕 아래 살지만,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 집에는 서로 다른 시간축이 교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떼는 딸아이가 고3이던 어느 여름날, 길 위에서 데려온 생명이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어미 없이 버려져 있었고,
처음 데려온 그날부터 병원은 마치 집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눈병 치료로 시작해,
아들아이가 쓰던 귀마개를 삼킨 날엔 급히 수술도 해야 했고,
이후 중성화 수술까지 이어지며,
라떼는 말 그대로 ‘초반 병원 출근이 잦았던 아이’였다.
6년을 함께 살았지만, 라떼는 지금도 경계심이 강하다.
슬며시 다가가면 멀찍이 물러서고,
눈을 마주치면 시선을 피한다.
기분이 나쁘면 하악질로 먼저 신호를 보낸다.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다.
한 걸음 더 다가가면 발톱이 날아오고, 간혹 물기까지 한다
라떼는 자신의 경계를 몸으로 그리는 존재다.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닫은 건 아니다.
일정한 거리, 그것만 지켜준다면 조용히 곁에 머물러 준다.
라떼와 함께 산다는 건,
타인의 리듬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는 일과 비슷하다.
행복이는 그 반대다.
문이 열리면 먼저 달려오고,
눈이 마주치면 꼬리를 흔든다.
행복이에게 시간은 늘 ‘지금’이다.
과거의 냄새도, 미래의 예감도 중요하지 않다.
행복이는 현재의 감각에 충실하게 반응하고,
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그 생동감은 때로는 나를,
때로는 집 안 공기를,
때로는 라떼를 자극한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시간은 누구의 편일까.
기억을 품은 자에게?
지금을 살아내는 자에게?
라떼의 시간은 응축되어 있다.
필요한 순간에만 움직이고, 나머지 시간은 고요히 웅크려 있다.
마치 파동이 입자가 되기 전, 관측되지 않은 채 진동하는 가능성처럼.
행복이의 시간은 확산된다.
모든 공간에 흔적을 남긴다.
눈빛, 숨소리, 발자국.
행복이는 언제나 이 집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한다.
그 확산된 시간은 나에게도 스며들고, 감정에 작용한다.
나는 자주 행복이의 현재에 감염된다.
둘의 전투는 하루 세 번의 리듬을 따라 반복된다.
첫 전투는 새벽 3시.
고요한 어둠을 뚫고 시작되는 쫓고 쫓김.
위층에 올라온 라떼가 스치듯 행복이의 시야에 들어오면,
고요는 바로 파문으로 번진다.
두 번째 전투는 저녁 6시 반, 아내가 퇴근하는 시간.
아내가 위층에 올라오면
행복이는 신이 나서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다.
이 때, 라떼가 아내를 따라 올라오고
행복이가 눈 앞에 나타나면 경계의 촉을 새운다.
그리고, 행복이는 신이 나서 뛰어든다.
하나는 경고의 하악질을,
하나는 장난스러운 몸짓을.
각자 다른 언어를 가진 두 존재가 충돌하는 장면은 어쩌면 필연이다.
세 번째 전투는 밤 10시,
우리가 잠자리에 들 시간.
하루 중 가장 고요해야 할 시간에 다시 한번 파문이 생긴다.
라떼는 조심스럽게 위층으로 올라오고,
행복이는 침대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살금살금 가까워지다 갑작스레 펑,
그리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는 마지막 전투.
그들은 매일, 아주 정직한 반복 속에서 서로를 확인한다.
하지만 낮시간은 조용하다.
라떼는 아래층 딸아이의 방,
그중에서도 이층 침대 위 가장 높은 자리에서 잠을 잔다.
그곳은 세상과 가장 멀고, 동시에 가장 안전한 피난처다.
햇살과 체취, 오래된 담요가 어우러진 그 공간 안에서,
라떼는 하루 대부분을 잠으로 채운다.
행복도 평일 낮에는 조용히 혼자 시간을 이겨낸다.
아내와 내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주말에는 밥을 먹고,
테라스를 어슬렁거리고,
간혹 졸음에 빠지기도 하지만,
늘 현재 안에서 움직인다.
둘의 낮은 서로 닿지 않는다.
시간이 어긋나 있는 덕분이다.
낮의 평화는 시간의 충돌이 없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서로 다른 파동이 만나지 않을 때, 간섭이 일어나지 않듯이.
서로 다른 진동수의 파동이 같은 공간에 존재할 때,
어떤 순간엔 증폭이, 어떤 순간엔 상쇄가 일어난다.
우리 집은 지금, 하나의 간섭무늬다.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면서도,
결국 하나의 리듬을 이룬다.
고양이와 강아지, 그리고 나.
세 존재는 각자의 시간에 산다.
하나는 기억의 밀도 속에서,
하나는 감각의 생동 속에서,
나는 그 둘 사이를 오가며 내 시간을 조율한다.
가끔은 라떼의 눈빛에서 오래된 별빛 같은 고요를 느끼고,
가끔은 행복이의 꼬리에서 폭죽 같은 생기를 본다.
그리고 그 틈에서,
나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진동을 배운다.
라떼는 아직도 사람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행복이는 아직도 고양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믿는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매일 작고 반복적인 진동을 지켜본다.
시간의 방식은 곧 존재의 방식이다.
경계하듯 흐르는 라떼의 시간도,
들뜬 듯 퍼지는 행복이의 시간도,
각자의 방식대로 진실하다.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서로의 시간을 간섭하고,
서로의 존재를 ‘관측’해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