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진공

by 늘람
DALL·E 2025-06-08 16.38.18 - In a dimly lit simple empty room without mirrors, place only two chairs facing each other. Visualize the superposition of two distinct sinusoidal wave.png

문득, 고독이 찾아왔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문 하나가 천천히 닫히고

또 다른 문은 열리지 않는 순간.

나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여전히 이어지지만,

그 울림은 나에게 닿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벽 너머의 세상처럼

움직임은 있지만, 소리는 없다.


나는 진공에 들어섰다.

진공에서 파동이 사라진다.

소리는 없고, 진동은 멈춘다.

모든 연결은 끊기고,

내 안의 미세한 파장만 남는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이토록 깊은 고요의 존재에.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만 홀로 멀어져가고 있음에.


고독의 원인은 없다.

고독은 그냥 존재한다.

고독은 존재하고 있었다.


고독은 감정이 아닌 상태.

관계의 단절이 아닌,

내 존재의 조건.

그 자체.


많은 우리는 고독을 거부한다.

늘 연결을 강요받는 삶.

항상 어울려야 하고,

언제나 말해야 하고,

매일 함께 해야 한다는 그런 삶에서.

연결되지 않은 존재는 결핍된 존재로 보인다.

일반화 되어 버린 생각의 굴레에서 갇힌채,

고독을 두려워한다.


고독은 악이 아니다.

고독은 부족함이 아니다.

고독은 그 자체.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


고독 속에서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일상의 시간은 선형적이다.

아침이 오고, 낮이 지나고, 밤이 온다.

고독 속에서는 시간은 팽창하고, 응축된다.

어떤 순간은 길어지고, 어떤 순간은 사라진다.


왜곡된 시간 속에서 나.

과거의 기억들과, 잊혔던 감정 속의 나.

미래는 멀어졌고, 현재는 깊어졌다.


시간의 중심이 바뀐다.

시계의 초침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다.

나만의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느리고, 부드럽고, 때로는 멈춘 듯이.


그 리듬 속의 고독은 고요다.

고요 속에는 진정한 나의 소리가 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외부의 기준에서 벗어나,

나는 나로서 나를 마주한다.


거울 없는 방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고독은 질문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존재를 확인한다.

고독 속에서는 관계 없이도 존재한다.

관계가 사라진 자리에서도 내가 '나'로 남는다.

진정한 존재의 힘이다.


고독은 인식의 공간이다.

타자의 시선이 없는 공간에서의 나는 정직하다.

감추려던 감정, 외면하던 생각들 앞에서도 떳떳하다.

가면 없는 나를 마주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다.


고독은 파괴가 아니다.

고독은 재구성이고, 고독은 나를 다시 짓는 공간이다.

나는 고독 속에서 더 단단해지고, 더 투명해지고, 더 나다워진다.


너무 많은 연결 속에서,

너무 많은 소음 속에서, 나는 고독의 공간을 만든다.

나만을 위한 방음실.

그 안에서 나는 내 고유의 진동을 확인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고독은 비어있지 않다.

진공 속에도 중력은 있고,

에너지는 흐른다.


고독 속에도 관계는 있고,

가능성이 숨쉰다.


그 가능성 안에서, 새로운 나를 만난다.


나는 오늘도 고독 속에서 작은 파동 하나를 품고, 조용히 숨을 고른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간다.

나의 고유한 진동을 지닌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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