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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최늘샘 May 20. 2018

오자와 키미사의 귀향

“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고 팔자지 뭐”

“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고 팔자지 뭐”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일어·영어학원 교사 유재창

  승우, 성환이와 얘기하고 있는 나를 보고 회색 정장에 땡땡이 넥타이를 맨 아저씨가 다가왔다. 지금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그분이 대단한 사람이니 여행자인 나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다. 다짜고짜로 가자고 이끌어서 당황했고 조금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갑작스러운 일을 피하지 않고 다가가 보는 것도 여행의 맛이라고 생각하며 따라가기로 했다.

  벌교에서 태어난 유재창 아저씨의 할아버지는 훈장이었고 아버지는 선생이었다.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나 순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1984년, “지금은 서경대로 바뀐 국제대학교” 일본어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거기서 대학 산악부 활동을 하다가 북한산 인수봉 B코스, 거기서  떨어져서 서울대병원에서 3년간 치료를 받았지. 그 다음에 퇴원하고는 내가 진짜 열공(열심히 공부) 해야겠다, 다짐을 했어요.” 일본어와 영어 테이프를 사서 들으며 학원에 다녔고, 친구의 소개로 일본 중앙대 경제대학원을 수료하고 돌아와 일본어 선생 일을 시작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어학의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였다.


  “상계고등학교, 유한대학교, 양재동 ULA어학원, 방배동 한샘학원, 시사일본어학원, 일본문화원... 강남, 강북 할 거 없이 서울에선 안 가르쳐 본 곳이 없어, 나는...” “고급 클래스”에서 만난 사람들의 제안으로 “강남역 대구은행, 제일은행, 테헤란로 비전주식회사,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에서도 강의했다.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서 “보통 서너 군데, 많을 때는 대여섯 군데” 수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한동안은 ‘오자와 키미사’ 라는 가명으로 “오바로크 치고” 일본인 행세를 하기도 했다. 

  “한국어는 전혀 안 쓰지, 꿈도 일본어로 꾸고, 다 그런 거지 뭐. 워낙 내성적인 숙맥 컨츄리보이였는데, 언어를 하다보니까 성격도 많이 바뀐 거지.”


  1998년, 몇 년 동안 사업 자금을 모은 오자와 키미사 씨는 십년 가까이 강의했던 경험을 살려 영등포에 경찰 학원을 열었다. 여기저기 떠돌며 일하던 시절을 지나 드디어 자신의 학원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IMF 외환 위기 상황에서 학원은 운영이 점점 어려워졌고, “당산동에 살던 아파트까지 담보로 해서 돈을 매우고 매우다” 결국 학원도 재산도 다 날리고, 가족과 함께 낙향했다. “압구정동에서 양주 마시며” 사장, 회장, 이사, 박사들과 어울리던 시절은 추억이 됐다. 


  “망했으니까.. 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고 팔자지 뭐. 이제 그냥 그때그때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서 애들만 잘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지 뭐..“


  요즘은 양복 안주머니에 긴 이력서를 몇 장씩 넣은 채, 강사 일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쉽게 구해지지가 않는다. 하루 빨리 취직해서, 일하고 있는 아내의 부담을 나누고 싶다.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인 세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남들 다 보내는 학원에야 어떻게든 보내지만, 공부하라 뭐하라 말은 안 해요, 나는. 공부야 다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고, 다 운명이고 팔자지 뭐... 저는 그래요. 운명은 뭐다? 팔자는 뭐다? 운명은 팔자다? 팔자는 운명이다? 나도 모르겠어요...”  



*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담는 필자는 한 명의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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