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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최늘샘 May 20. 2018

앵벌이 소년의 파란만장

전남 보성군 벌교읍 장애인협회 청년부장의 이야기

“내 생각에는요, 모든 사람은, 그 안에는, 
누구도 병신이 아닌, 어떤 마음이 있거든...”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신체장애인협회 청년부장 박민호

  유재창 아저씨를 따라 들어간 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와 작은 고양이 두 마리, 장애 활동 보조 일을 나온 아주머니 한 분과 박민호 아저씨를 만났다. 

  박민호 아저씨는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를 전혀 못 쓰게 됐다. “학교는 국민학교도 가본 적이 없어요.” 걷지 못하는 아이를 아버지는 자주 “두드려 패쌌고”, 견디다 못한 아이는 열한 살 되던 해에 “돈 칠백 원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 

  어디로 가서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순천버스터미널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아이에게 “너, 이런 장사 안 해볼래?” 하며 앵벌이를 시키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모아 짐차에 싣고 다니며 순천, 진주 등지의 시장에 내려놓고, 리어카에 실은 수세미와 이쑤시개 따위를 팔게 하고 수익을 벌어들이는 앵벌이였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한 달에 돈 오만 원 씩 주께.” 하고 말했는데, 그 돈은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 

  “유일하게 밥을 먹는 게, 시장에서 일하다가 먹는 거야. 그때 밥값이 백 원, 이백 원 했는데 한 오백 원 어치 먹으면, 왜 많이 사먹었냐고 뒤지게 맞는 거야...” 

  몸이 아파도 약 한 번 못 얻어먹으며 꼬박 5년을 일한 뒤, 열여섯 살 아이는 그곳을 도망 나와 혼자서 장사를 시작했다.             

  전국을 떠돌다가 좋은 자리를 찾으면 머물면서 장사를 했는데, 1980년대 초반에는 제주도에서도 1년 반 정도를 살았고, 충무에서는 90년대 초반까지 한 15년을 살았다. 


  “그때는 재래시장이 빵빵해서 장날에 날씨만 좋으면 돈을 오지게 벌었어. 뱃사람들이 돈 쓸 데는 없고, 돈은 많지. 오랜만에 육지에 나와서 술도 한 잔 마시고, 기분도 좋고 그러니까 물건 값보다 돈을 더 주는 거야.” “손으로 운전할 수 있게 세발로 개조한 시티 100”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웠고, 장애인 운전면허를 딴 뒤에는 “중고 포니 투”를 사서 물건을 싣고 다녔다. 자리 잡은 충무에서 적지 않은 돈을 안정적으로 벌 수 있었는데, “충렬사 옆에 사는, 첫사랑을 알게 해준 다방 여자”에게 크게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받아, “돈 버는 것 보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다시 객지를 떠돌다 마산에서 “각시를” 만났다. “각시 이름이 김영순(가명)이었어요. 꼽추였는데, 시장에서 나랑 같은 장사를 하고 있더라고... 세 번째 만나던 날에 내가 그랬어요. ‘나 니 좋은데, 내가 니 먹여 살릴게. 같이 살자.’ 그렇게 말하니까 ‘나 먹여 살릴 돈 있어?’ 그렇게 물어보대요. ‘집 하나 사고, 원하면 니 앞으로 해줄게.’ 그러니까 ‘내 앞으로는 안 해줘도 돼.’ 그러더라고요.”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대전 청과물시장 옆 우성아파트 1513호”에 신혼집을 차렸다. 1507호도 사서 월세를 줬다. 56평짜리가 3,500만원으로 지금에 비하면 아파트 가격이 쌀 때였고, “열심히 해도 지금은 안 벌리는데, 희한하게 돈이 잘 벌리던” 시절이었다.       


  “이 세상은, 우리 장애인들한테, 살기가 엄청나게 힘들죠.” 


  1962년생인 아저씨의 1970년, 80년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그랬다. “사람들은 장애인을 ‘저 쪼그마한 병신 육갑한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거나, 외면해요.” 버릇없는 아이들은 손짓을 하며 놀려댔다. “장애인은 무조건, 도와줘야 되는 인간, 또는 골치 아픈 존재, 취급을 당해요.” “올림픽 이후” 1990년대,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도적으로 나아진 점이 많지만, 장애인을 보는 비장애인들의 시각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


  “나는, 두 다리를 못 써도, 절대, 절대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안 줘... 왜? 혹시, 혹시라도 누가 나보고 병신이라고 할까봐... 뭐냐면, 그 누구의, 그 어떤 사람의 입에서라도 ‘저건 병신 새끼야!’ 하는 말이 나오면 베려버려... 왜?! 사람은, 내 생각에는요, 모든 사람은, 그 안에는, 누구도 병신 아닌, 어떤 마음이 있거든...” 

  아무리 사이가 안 좋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라도 병신이라는 말은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마음으로 평생 스스로의 힘만으로 당당하게 살아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운명적으로 가정을 이룬 부부는 곧 예쁘고 건강한 딸을 낳았다. “나는 가족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우리 가족, 우리 딸하고 우리 각시가 소중한 거야.” 그렇게 드디어 행복과 안정이 찾아왔는데, 애기가 돌을 지나고 세 살 가까이 됐을 때, 각시가 병원에서 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야, 그게...” “나 성질에 (치료비로) 집이고 뭐고 다 (처분) 할 거라는 걸 안께” 각시는 자신의 병을 한참을 숨겼고, 입원도 마다했다. 그리고 갑자기 신랑의 고향인 벌교로 가자고 했다. 

  벌교에 온 뒤 각시는 곧 세상을 떠났고, “세 살배기 꼬맹이 딸을 두 다리 없이 혼자” 키운 그 5년, 6년이 평생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이다. 한 번은 소주에 다량의 수면제를 삼키고 애기와 함께 죽으려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벌교에 사는 동생들과 제수씨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꼬맹이는 똑똑하게 자라나 이제는 대학생이 되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벌교역 대합실을 밝히는 형광등이 켜졌다. 오늘은 어디까지 어떻게 가서 밤을 지낼까 생각하며 행선지를 하나씩 하나씩 읽고 있었는데, “기차표 아직 안 끊었으면 와서 자고 가요.” 민호 아저씨의 전화였다. 소주 한 병 사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낮에는 바깥으로 나다니지만 저녁이면 항상 아저씨의 곁에 돌아오는 고양이들의 이름은 ‘믿음이’와 ‘사랑이’다. “수놈 사랑이는 암놈을 사랑하라고, 암놈 믿음이는 수놈을 믿고 살라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라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요.” 하나의 전기장판 위에 믿음이, 사랑이, 아저씨와 내가 함께 누워, TV를 보고, 아저씨가 즐겨 부르는 나훈아의 노래 <불효자는 웁니다>와 <짝사랑>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요즘도 박민호 아저씨는 일주일에 이삼일은 봉고차에 “최고의 물건만” 떼다 싣고 움직이며 벌교와 순천의 시장에서 수세미 장사를 한다. 불현듯 멀리 떠나고 싶어지는 날에는 며칠씩 먼 곳에 가서 여행을 하듯 장사할 때도 있다. 


  “나는 장사하면서요, 절-대 사기는 안 쳐요.” ‘박민호’라는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장사하고, 살아간다. “항상 마음으로 ‘내가 박민혼데, 내가 박민호니까, 열심히 해야지...’ 그 생각을 해. 남들은 박민호 당신이 뭐 대단하냐고 하지만, 나는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담는 필자는 한 명의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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