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동부동 우즈베키스탄 이주노동자 이야기
“앗살람 알라이쿰”
거리마다 연등이 불을 밝혔다. 초파일이 다가왔나 보다. 안동 시내 번화가 사거리에서는 빨간 텔레토비 인형 옷을 입은 아르바이트생이 돈까스집 천 원 할인 쿠폰을 나눠주고 있었다. ‘골목상권 죽이는 홈플러스 출점 결사반대’, ‘각성하라’ 외치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렸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찜질방을 찾아가다가 석가탄신일 전야제 제등 행렬과 마주쳤다. 초롱초롱 형형색색의 등을 들고 걷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구경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주 손을 흔들며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하고 있는 외국인 청년이 보였다. 숙소인 문화모텔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시끌벅적한 음악소리에 놀라서 구경 나온 우즈베키스탄 출신 이주노동자 쟈홍길이었다.
쟈홍길이 살던 곳은 실크로드의 고대도시 사마르칸트시(市)에서 가까운 사라테파다. ‘쟈홍 Jahon’ 이란 말은 우즈베키스탄어로 “높이 가서 앉다” 라는 뜻이며, ‘길 Gir’ 은 “둥글다, 모으다” 의 뜻이다. 스물두 살에 한국에 와서 삼 년 너머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 사 년을 더 일한 뒤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인천 가전오거리” 목재 공장에서 일하며, 목재 놀이터 시공을 위해 직원들 몇 명이 함께 전국으로 출장을 다닐 때가 많다. 며칠 전 부산에서 공사 하나를 끝내고 어제부터 안동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쟈홍길’은 발음이 어려워서 동료들 사이에서는 ‘존’이란 쉬운 영어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쟈홍길은 사라테파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일 년 동안 엄마를 도와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했다. 그 뒤에는 엄마를 쉬게 하자고 아빠와 의견을 모으고 아빠가 일하던 카센터에 나가 일했다. 그러면서 가족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던 중, 한국에 가 있던 친척 형의 소식을 듣고 한국행을 준비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학생에게 일주일 간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에 와서는 모르는 단어를 메모하고, 한국 드라마를 자주 보면서 말을 익혔다. 한국어를 배울 당시 만들었던 메모장은 몇 년 뒤 한국에 온 우즈베키스탄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이제 매달 자신이 돈을 보내고 있으니 아빠에게 일을 그만두시라고 말했는데, 아빠는 “에이, 심심하잖아.” 라고 말하며 아직까지 일을 하고 계신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큰아들이 무조건 동생들 도와줘야 돼요.”
쟈홍길에게는 마데나와 말레카라는 이름의 두 여동생이 있다. 한국에서 일을 해 보내준 돈을 지참금으로 얼마 전 마데나가 시집을 갔다. 서류 상으로 불법체류 상황인 탓에 결혼식에 갈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도움으로 여동생을 시집보낼 수 있었던 게, 먼 나라에서 일하면서, 아니 살아오는 동안에 제일 보람 있었던 일이다.
“지금까지 3년, 앞으로 4년, 그렇게 7년 동안 가족들 얼굴 못 봐요...”
가족들 얘기를 꺼내다가 쟈홍길은 울컥 나오는 눈물을 감췄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나던 여자친구는 전화로 이별의 말을 전했다. 가족이 많이 그립지만, 필요한 돈을 모으기 전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때까지 일을 해야만 필요한 돈을 모을 수 있다.
“돈만 모으고, 건강하게 집에 가고 싶어요.”
4년 뒤 돌아가면 스물여덟 살이다. 그때가 되면 장가도 가고, 가족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가게나 사업을 꾸릴 계획이다.
제등 행렬을 구경하고 편의점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쟈홍길은 나를 “형님” 이라고 부르며 “형님은 결혼했어요?” 묻고, “형님, 나중에 인천 가전오거리 놀러오세요.” 하며 휴대폰 번호를 알려줬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만날 땐 “앗살람 알라이쿰.”, 헤어질 땐 “라사라우”, “라사라벳” 이라고 인사를 나눈단다.
“라사라우, 쟈홍길! 힘내자! 무사히 일을 마치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 사라테파의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기를!”
安東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하였으며 삼국사에 의하면 기원전 57년 염상도사가 길지(吉地)를 찾아 이곳에 와 처음으로 창녕국이라는 부족국가를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병산(甁山)에서 싸울 때 고을 성주들이 고을민을 이끌고 태조를 도와 그 공이 컸으므로 부(府)로 승격하고 지명을 안동으로 고쳤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