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야옹 Jun 30. 2024

가닿는 인간이 될 결심

방송PD, 동물권에 뛰어들다

눈에 밟히는 동물들이 늘어난 게 화근(?)이었다!


길에 사는 고양이들, 관광 마차를 끄는 말, 횟집 물고기들, 파리의 비둘기 떼, 대만 새시장 앵무새들, 호주의 코알라들, 엄마가 키우는 고양이들, 하루가 머다하고 뉴스에 나오는 동물학대 사건들. 마치 동물들이 "우릴 좀 봐! 네가 해야 할 일은 이거야!" 하고 말하듯 자꾸 일상에 끼어들어 아른거렸다. 퇴사 시기와 맞물려 전국적 인기 스타가 된 푸바오 신드롬도 한 몫 했다. 


푸바오는 행복할까? 판다에게도 판다답게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기만 한다면 동물을 가두고 전시하는 행위엔 문제가 없는 걸까? 동물의 자유를 박탈하고 무대에 올려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과거 지배계층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려 유색인종을 가두고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던데, 먼훗날 우리도 후손들에게 같은 이유로 비판 받진 않을까? 에버랜드의 비인기 동물들은 어떻게 관리되고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게 동물권이란 그저 동물이 귀엽고 불쌍하므로 보호해야 한다는 감성적 동정과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그것은 논리와 이성의 문제였다. 동물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데, 인간에겐 안되지만 동물에겐 해도 되는 종류의 폭력이 있다는 게 납득이 안 됐다. 동물들게에 교육권이나 투표권을 주자는 게 아니라, 그저 때리고 괴롭히고 죽이지 말자는 데 반대한다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만큼이나 근거없는 종차별이 아닌가! 동물이기 때문에 살처분해도 되고, 동물이기 때문에 잔인한 실험대상으로 삼아도 된다는 건 내게 1+1이 3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비논리적이고 해괴하게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1+1은 2인데 말이다.


나는 언젠가 흑인이나 여성들처럼 동물들도 해방될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역사는 느려도 진보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앞당기는 데에 나머지 인생을 쓰기로 결심했다. 누군가에게 동물권이란 피부로 와닿지 않는 문제라는 걸 안다. 나도 어언 30년동안 죄책감없이 동물 고기를 먹으며 살았었으니까. 와닿지 않는다는 이들을 비난할 자격이 내겐 없다. 대신 김한민 작가가 말했듯이, 와닿지 않는다면 내가 가닿겠다. 이 책이 그 매개체가 되기를 바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