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싫어하지 않는 방법Ⅰ

나는 시대가 빚은, 충분히 있을법할 정도로만 모난 소행성일 뿐인지도

by 는개


제 아빠는 굉장히 친교적이며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좋은 그런 분입니다.

널리 알려진 극 중 인물 중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 아빠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그때 태어났어요. 저 때 청소년이 아니었습니다 ㅎㅎㅎ)


90년대를, 밀레니엄을 넘어 살면서 80년대 아저씨인 아빠에게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성인이 되어서 옛날분이라 그런다고, 포기하듯 이해하고 넘긴 부모님의 사고방식과 태도.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고 못마땅해했던 모든 것들이 이젠 뒤집혀 다르게 보입니다.


나의 맏이 노릇은 기억하는 순간부터였으나 늘 언니답지 않다는 말이 같이 붙었어요.

본격적인 K- 맏이 노릇은 집에 차압딱지가 붙고 그 유체동산들까지 돈 되는 것들은 다 뺏기고 허름한 방 두 개짜리 월세방에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가였어요.


10대 때부터 각종 재산으로 잡힐 수 있는 모든 동산들이 제 이름으로 바뀌게 됐어요.

제 소득은 매일 6시간, 시급 2300원으로 계산된 얼마간이 전부인데, 제 이름으로 개설된 통장만 열개가 넘었어요. 수많은 숫자들이 오가는 통장위에 서 있을 때 저는 하루 24시간 잠도 안 자고 일하는 사람이었어요. (엄마 아빠는 새벽부터 오후까지 일하고, 저는 보통 전공수업이 모두 끝난 18시부터 자정까지 일했으니까요.) 전공수업 중에 급하게 연락 와서 대출을 받아달라는 전화도 서슴지 않던 아빠였는데...


황당하기까지 했어요.

그 태도 전환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도 아무도 뭘 시키지 않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구도 서운해하지 않아요.

그저 결혼 하나를 했을 뿐인데.


진짜 '출가외인'이라는 게 이런 건지. ㄴㄴㄴ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누구도 서운해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씩이야 해도 결국 친정은 시집간 딸에게 폐 끼치면 안 된다 이건가.










사실 저는 결혼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어요.

아직도 계신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있는, 노후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부모님과

딱히 믿음이 가지 않는 동생들.


남의 집 귀한 아들 고생시키느니

결혼하는 건 그냥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가정을 이룬다는 뭔가 거창한 포부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라거나, 아이를 낳아 엄마로 살려면 걔의 성인까지.. 하면서 긴 시간을 생각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애당초 남친이와 교제하게 된 것도 둘 다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였으니까.


결혼을 결심한 건, 아주 대단한 이유가 아니었어요.

이것저것 생각하니 절대 할 수가 없어서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되었을 때 내가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없는가]

저에게 삶은 모든 것이 책임이었거든요.


민폐는 아니겠다 싶었어요.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는 몇 년째 오늘만, 일주일만, 하며 살고 있고, 혹시 내가 너무 피해를 주게 된다면 나 혼자 감당하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제도가 없지도 않으니까. 마지막으로 얼굴 딱 한 번만 보고 이혼해 주면 되지, 혹시라도 죽으면 적지 않은 액수의 사망보험금을 남겨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미안하지만.


그러고도 아주 크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저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한 명 늘어나고, 의무를 다해야 하는 식구들이 늘어난 것뿐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건 철저하게 저만 생각한 거였더라고요.


부모님을 비롯해 친한 친척 몇 분에게서 제게 달려오는 모든 달라진 태도들이 입이 막혀 아무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저를 당황스럽게 합디다. 사는 내내 내 사고방식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어 앓기만 했던 유년의 많은 날들이 이제 다르게 읽힙니다. 내가 너무 이상하다고, 별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의 '나'는 그저 시대가 빚은 산물이고,

별 다를 것도 없고,


그저 이 시대에 있을 수 있는 그저 그런,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도 못 된

소행성이었던가.


화성과 목성 사이,

제 이름도 가지지 못한 소행성.

군단 속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 소행성.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공전하는

돌멩이 같은 소행성이었을까...

겨우 그 정도가 아닌 게 아닐까...


비슷비슷하게 생겨 구별도 안 가는 군중 속에

어느 시대나 급진적인 이도, 뒤떨어지는 이도 있듯이

그저 흔하디 흔하게 모난,

'아주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이상한 아이' 라는 생각에 도착하고 나니 약간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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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는 조금 더

덜 싫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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