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누구도 서운해하지 않아요.
'무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무언가'가 되게 강박을 갖지 않는 것.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누구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는 게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게,
묘한 기분이면서도 좋기도 했습니다.
하다못해 일례로 집안행사는 품앗이라면서 한 만큼 돌아온다더니.
여기저기에 친척들이 모이는 집안행사면 다 참석은 다 해야 했었어요. 그냥 당연한 거였습니다. 참여하지 않는 것이 나쁜, 욕을 먹는 행동이었어요. 그렇게 가서는 당연하게 산더미 같은 뒤치다꺼리가 많았어요. 큰엄마 작은엄마들을 도우고, 삼촌들이 불러 뭐 시키면 하고... 하지만 내가 그 의무를 행하는 만큼 가지는 건 없었어요. 설거지를 그렇게 시키고, 음식을 그렇게 만들게 하고, 일은 일대로 하고 알바 갔다가 늦게 오면 야단맞았는데 정작 나에게 돌아오는 건 수고했다는 말 하나도 없었어요. 근데 다 그러니까 그게 당연한 건데 저만 불만이 생기고 저만 싫은 줄만 알았어요. 내가 사람이 덜되서, 내가 장녀로 너무 부족한 사람이어서, 내가 못돼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실제는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니었던 거더라고요.
장손이나 장녀 같은 것도 아닌
그냥 차남의 첫째,
아들도 아닌 딸.
어린 동생들은 하지 않던 모든 일들을 한 이유는
그저 집안 전체의 여자아이들 중 제일 나이가 많다는, 그 이유, 하나일 뿐이었어요.
어차피 도리 따윈 없었어요.
해야 할 의무 따위도 없었습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위로 다섯 살 차이의 누나와 두 살 차이의 형을 둔 셋째,
도시로 유학 간 형과 누나를 두고 장남 우선주의였던 할머니 옆에서 겨우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돈 벌어 동생들 학비를 대고 생활비로 집에 갖다주고. (나중에 고모에게서 결혼하기 전까지 고모가 벌었던 월급을 할머니가 다 가져갔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렇게 교육받고 살았던 부친에게서
그대로 교육받고 자란 결과였을 뿐.
친하지 않은 사촌동생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 애가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았어도 나는 안 가면 엄청나게 혼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비난받지 않았어요.
아니었어요.
할 사람은 많아요. 꼭 나여야 할 필요도 없었고, 내가 할 필요가 없었어요.
난 그저 머릿수를 채우는 아무 나였던 겁니다.
의무로 여겨지던 모든 것을 어떻게든 외면하려 애쓴 나날이 헛것이 아니었어요.
사촌동생 결혼식에 가지 않으려고 휴대폰 게임만 붙잡고 있던 과거의 내가 참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습관이 된 강박을 잊고 외면하려 버티고 또 버티는 중입니다.
하다 못해 내가 장손이었던 큰 아빠의 아들인 오빠(그저 사촌이고 개인적으로 따로 만날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닌데)를 특별하게 여긴 이유도 깨달았어요. 아빠가 입버릇처럼 '느희 오빠는', '느희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같은 말을 너무 오래 들어온 탓이었어요. 장남과 장손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던 할머니 옆에서 제일 오랫동안 같이 산 사람이 아빠였으니까요.
오빠는 늘 집안의 자랑이었어요. 공부 잘하고, 훤칠한.
오빠에게 저는 그저 나와 다른 아이들보다는 훨씬 자주 보는 그저 사촌동생이었습니다. 자신의 친동생보다 나이가 위여서 자신이 고등학생일 때 고등학생이었던 사촌동생. 오빠는 나에 대해서 잘해봐야 그 정도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친밀하지도 않고, 딱히 특별한 일이 있었다거나 하지도 않아요.
전 오빠에게 딱히 의미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내 마음에 오빠는 늘 벽처럼 있었어요. 학교 다닐 때야 아빠 말마따나 '오빠처럼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으니 그랬다 친다 해도, 어른이 돼서도, 특히 서른이 넘고 나서는 더 많이 생각났어요. 좋은 대학교를 졸업해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오빠에 비해서 제가 보잘것없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이상했는데...
가족과 싸우고 눈물이 멈추질 않아 처음 병원을 방문해 우울증 판정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던 초기,
마음에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던 저에게 오빠는 꿈에도 나타나서 힘이 돼 주었어요.
그게 나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진짜 힘이 돼준 사람을 꼽는다면 오빠인 J가 아니라 그 동생인 Y인데,
오빠에게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인데,
꿈에 나타날 거면 오히려 Y가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Y와는 서로의 진로상담을 진지하게 할 정도로 각별한, 친 여동생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입니다)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게 아빠의 입버릇 때문이었다니.
이 정도면...... 세뇌였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정말 세뇌였는지도 모르죠)
엄마의 음력생일도 가끔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하는 일도 있었으면서, 오빠의 생일은 기억하고 거르지 않고 케이크를 선물로 보낸 게 한 두 해가 아니었어요. 이 답 없는,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던 나 혼자만의 마음조차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매번 나만 오빠를 특별히 여겨서 이상했는데 그것 역시 내 의지가 아니었고,
진짜 내 마음도 아니었고, 내가 원한 것도 아닌, 무의식 중에 학습된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이상한 게 아니었어요.
이상한 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길러지는 거였습니다.
오랫동안 쏟아지는 의무들에 허덕거리며
최선을 다해도 비난, 잘해야 침묵이었던 지난한 과거.
나는 나를 탓하며 나의 모자람을 부끄러워하며 살았습니다.
한 번도 쉬운 적도 없고 늘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던,
의무는 많은데 의식주를 걱정해야 하는 집안 환경에서
매일매일을 생존하려 애쓰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수 없이 매번 자책했던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다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덕분에 생활력이 강해졌고 그게 내 장점이라고 가까운 이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난 늘 그게 싫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발버둥을, 처절한 몸짓을 보는 기분이어서요.
돈이 없어서 비참했었던 과거가 자꾸 벼락처럼 지나가며 저의 하루를 전부 휘저어 놓아요.
그리고 그 감정이 너무 오래가면서 우울해져요. 그렇게 기분이 가라앉으면 약을 써도 다시 떠오르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더라고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야겠습니다.
보호받으며,
보살핌을 받으며,
할 줄 아는 것 없이.
씩씩하지 않게.
할 만큼만
마음이 동하는데 까지만 하면
해주고도 욕먹는 일이 일어나진 않을 테니까요.
생색낸다는 말도 안 들을 수 있을 거고.
일단,
또 하나를 찾았습니다.
나를 싫어하지 않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