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아가고 있어

달라지기 힘들지만 그래도, 손톱만큼이라도 나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by 는개




"는개씨 얘기만을 듣는 건 처음이네요."



지난번 상담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 말을 처음 들었어요.


저는 혼자 있지 못하고, 사람 만나는 걸 에너지로 얻으며

술자리에서도 가장 말이 많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상담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모든 말이 말이지, 하고 생각했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사연이나 과거 말고

내 일상, 내 현재.

나의 순간.


이어 말씀하셨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습니다.




"는개씨에게 집중하세요.
자신에게 신경 쓰는 무엇인가를 하세요."






내가 여태 그랬었나.

자신에게 신경 쓴다는 것이 뭘까.


다이어트 고민 안 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초콜릿과자를 먹어서 살찌고 있는 걸 스트레스받고 있었었는데.

기미나 트러블에 계속 신경 쓰고 있었는데.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엔 나를 위해서라며 치킨과 맥주를 먹는 날이 수두룩한데.


대체 뭐가 다르지.

지속해서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더라고요.











사람이 어디 쉽게 바뀌나요.

여날과 별 다름없이 인연을 먼저 끊은 이들에게

순간순간 머릿속을 지배당하고 휘둘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별 다름없이 과거를 되짚고 샅샅이 분석하려 애쓰며.


이렇게 나름대로는 많이 노력하는데 내 어디가 싫어져서 그렇게 버리고 떠나간 건지.

25년 전 단짝이었다가 멀어졌던 그 아이도,

20년 전 주변으로부터 친한 게 의외야,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내 좋은 점을 봐주었던 그 언니도,

19년 전 그 선배도, 그 동기도, 그 후배도.

13년 전 나는 너무 좋은데 언젠가부터 날 귀찮아하던 그 사람도.

흘러

흘러

6년 전, 아주 내밀한 개인적 사정까지 알 정도로 친하게 지냈던 직장동료가 날 버리고 간 건, 우울이나 온 지 얼마 안 됐던 때였어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어떤 사람도 곁에 두지 않았습니다.


날 생각하지도 않고 편히 살고만 있을 이들이,

내 이름조차 잊고, 내 생김새도 희미하게 기억할 이들이

위성처럼 매일매일 보이고 들립니다.


회의를 하다가도 순식간에 그 과거의 그 장소에 서서 몇 백번은 받았던 똑같은 상처를 또 받고 돌아와요. 혼자 기대하고, 생각하고, 또 서운해하고 속상해했던 과정의 아픔들이 레이어링 되듯 겹쳐져 그 모든 것이 동시에 할퀴어요. 그 몇 초 사이에.


왜 나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 날 잊은 사람들의 유령에 둘러싸여 사는 걸까요.


엄마 아빠가 잘해주고 예뻐해 줬던 따뜻하고 눈부신 기억들도 많을 텐데 그런 기억들은 생각나지 않고 왜 나쁜 기억들만 생각나고, 떠오르고, 거기에 상처받고. 또다시 아물고 있는 딱지를 뜯어버리듯 더 크게 흉이지는 행위들을 반복하고 그러는 걸까요.


난 왜 이리 이상한 인간일까요.








자신에게 신경 쓰라는 말을 들은 이후 몇 번의 상담을 거쳤습니다.


여전히 기억에 시달리고, 울고, 약을 먹고, 술을 마시고, 또 에피소드들에 시달리다

다시 이 이야기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초코칩을 먹으려 하지 않고 (비록 안 먹으려 안정제를 먹었대도)

시간 맞춰 약을 먹으려 노력하고 (비록 자꾸 시간을 어기지만)

술을 먹지 않으려 노력하고 (비록 그 채로 수면제에 의존해 잠들려 하지만)

아주 작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선생님은 대견하다는 말투로(내게 그렇게 들린 거겠지만) 그게 나에게 집중한 노력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타인의 시선이나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 지하는 생각보다 나를 더 앞에 둔 거라고.


그 모든 노력이 의지박약 하고 모자란 나를 증명하는 근거 같아서 감추고만 싶었었는데

아니래요, 선생님이.


나를 앞에 둔 노력이래요.

선생님이.


노력해서 나아가고 있는 거래요

선생님이.


의사 선생님은 제일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맞지 않을까요?


믿어지지 않는, 안 믿는 마음을 달래고 또 달랬습니다.


.

.

.


나를 슬프게 했던 사람들에게 휘둘려 시달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먼저 두고 무엇인가를 하게 됐으니까 그것만으로 나아간 것인가 싶더라고요.

그게 맞나 싶지만,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나를 마음 아프게 하는 동생들의 전화번호를 차단했습니다.

얘네도 기억에서 날 휘두르고 있는 사람 중에 있는 사람이에요.

여동생도 남동생도 따로 연락 안 하고 살고, 여동생은 저를 피해 다니는지 몇 년을 못 봤어요. 엄마가 언니니까 져주라고, 동생이랑 화해하면 안 되냐고 틈만 나면 말해서 괴로워만 하고 있었거든요. 이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 말씀에는 맞는 말이라서 했어요. 제가 덜 휘둘릴 거라고 믿고 해 보기로 했습니다.


나에게 나를 먼저. 중얼중얼 오늘도 주문을 외웁니다.



나에게 '나'를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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