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마냥 다른 사람처럼 갑자기 확, 달라지는 일은 없다
삶은 극적이지 않아서 마음먹으면 한 순간에 변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당연히 점찍는다고 다른 사람이 되지도 않고)
(물론 점찍는다고 다른 사람이 되지도 않고
물론 노력하면 변하겠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이전에 비해서 나아질 수 있겠지만 절댓값으로는 별 차이 없을 수도 있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있던 구렁텅이에서 못 벗어나기도 하고요.
하루에도 갑자기 몇 번씩 맑았다, 흐렸다 하는 기분을 모두가 느끼고 사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는, 언젠가 작은 바닷가마을에 사방을 책으로 둘러싼 작업실을 꾸며놓고 살아야지 하는 소망을 품었어요. 도시의 소리보다 자연의 소리가 많이 들리는 곳에서 수필처럼 넉넉한 말들을 들으며 느리게.
또,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정의 스펙트럼도 넓고, 진폭도 크다는 걸 알게 되고서는 내 인생에 극성이란 손톱만큼도 없었으면 좋겠다, 하고 바랐어요. 수필까지는 바라지도 않을 테니 매일이 극처럼 휘몰아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언젠가부터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니까]라는 말을 무서워했었어요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던 건가 싶기도 하고.
우울이가 오기 전에는 매일 미래를 위해 살았어요.
빨리 일을 마치고 맥주를 마시거나 책을 보며 잠들 생각만 하면서.
우울이나 오고서는 매일 과거와 싸우며 살고 있어요.
몇 십 개의 평행우주 속에서 수백 개의 많은 과거의 한 순간에 서있다가 다시 지금 있는 순간으로 오기를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미래만을 위해 살다가 과거 속에서만 살고 있으니
내 현재는 늘 어디에 있는지.
과거의 나는 미래를 위해서 너무 많은 오늘을 희생시키며 살았는데, 그 미래인 지금은...
꿈꾸던 미래가 아니라고 하여
멋대로 실망하고 깎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우울해하며 과거의 망령들에 사로잡혀 살고 있네요.
문득
오늘에게
미안해졌어요.
제대로 현재와 마주 한 적도,
제대로 오늘을 살려하지도,
오늘만을 위해 오늘을 살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과거에게 점령당한 오늘의 자리를 찾기로 했습니다. 송곳 꽂을 땅만큼이라도 되찾아서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아보겠다고.
현재를 강점한 과거로부터 오늘을 되찾기 위해,
지금의 나에게서 과거와 현재를 분류해 내는 작업이 필요하겠더라고요.
나를 이루고 있던 것들을 종이에 써보기로 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빈 종이를 앞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한참 동안 쓸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과거고
무엇이 현재고
무엇이 어제고
무엇이 오늘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왜
왜
왜
왜
왜
왜
못 쓰겠지?
뭐든 써서 아니면 버리면 되는데.
연습장 하나 가득 써서 쓸만한 아이디어를 하나도 못 건지는 것도 예사인데
드라마 한 편을 써내라는 것도 아닌데
왜 한 글자도 안 써지는지.
이게 뭐라고 쓰질 못하는지.
한심했습니다.
그러다 드라마 교육원에서 만난 글벗과 오랜만에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다가 예기치 못한 제안을 받았어요.
지금 자기는 이러이러한 애플리케이션으로 어쩌고 저쩌고 해서 오픈 채팅방으로 글쓰기 모임을 만나게 됐고, 공저로 책을 발간했다고.
그러면서 그러더라고요.
는개씨도 해봤으면 좋겠다고.
한 글자도 써지지 않았던 얼마 전이 생각났어요. 순간 무서워졌어요.
이것도 못하는 걸 들키면 안 되는데.
지금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싶어 거절했는데 그가 내게 말해왔어요.
당신의 과거를 생각해 보라고.
전공해서 졸업작품집도 발간했던 사람인데 이 정도면 사실 식은 죽 먹기인 거 아니냐고.
우리 수업 같이 다닐 땐 2부작도 썼던 사람이지 않냐고.
16부작 드라마, 미니시리즈 작법 강의 듣고 나서
4부작 시놉시스 썼던 거 기억 안나냐고.
슬럼프가 왔던 건 내가 안다고.
맨 처음 우울증 진단을 받기 전부터, 아니, 드라마 작법 수업을 다니지 않기 시작할 때 부터지 않냐고.
딱 보름 만(알고 보니 평일을 전부 붙여서였지만)
딱 3분 정도만 투자해서 (말이 3분이지 카레도 아니고)
3줄 이상만 쓰면 된다고. (말이 3줄이지 한 글자 쓰고 엔터키만 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주말도 다 쉬고 (나부터가 주말을 쉬는 직업이 아닌데 무슨상관?)
안 내키면 안 써도 된다고. (......)
저는 그 자리에서 끝끝내 대답하지 못하고 커피만 마셨어요.
[안 내키면 안 써도 된다]는 그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한참 고민을 하다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해보겠다는 글자를 써서 보냈어요.
곧 답이 왔어요. 잘 생각했다고.
바로 며칠 전까지 한 글자도 못 써놓고 잘하는 일인가 싶었지만
'쓰기 싫으면 안 써도 된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던 것 같아요.
며칠 전 까지는 과거 때문에 괴로웠는데,
지금은 과거가 날 믿어봄직하게 만드네요.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