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삽화에 기생해서 발현되는 피해의식
다만 몇 줄이라도 써보겠다는 의지가 겨우 터럭만큼 이지만 생겼는데 민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글벗의 권유가 무색해지도록.
우울삽화에 활개치고 다니던 우울이가
결국은 잡아먹었나 봐요.
어떤 방송사에서 방영을 시작한 한 드라마 때문에 일주일 내내 우울하고 힘들었어요. 2013년에 처음 구상해서 2016년에 단편으로 썼던 제 작품과 콘셉트가 똑같더라고요. 내용도 유사하고. 게다가 결말로 나아갈 길이 너무 확실한 내용이다 보니 흐름도…
제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죠.
당연해요.
그렇지만 수업에서 발표하고 합평하고
깨알 같은 글씨로 피드백사항을 가득 적고 또 적어서 몇 백장을, 몇 천 줄을, 몇 만 글자를 고치고 고쳐 썼던
그 수많은 시간이 무용해졌다는 생각이 드니까 안 그러고 싶어도 가라앉게 되더라고요.
그저 습작일 뿐인데.
그 작품에 퍼부었던 저의 정말 많은 마음들이,
너무 아까워서.
그래봤자 그냥
그저 습작일 뿐인데
우울이가 저를 떠나게 하기 위해서, 혹은 이 심연에서 수면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약을 먹는 것 외에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관련 심리학 책이나 에세이를 읽고, 잘못된 자기인지에 도움이 된다는 영상들을 보긴 해요. 그런데 그게 소용이 있는 걸까요. 제 인식과 생각 흐름 루트는 피해의식에게 자꾸 발목을 잡혀 저지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하고, 술은 계속 늘고, 그때마다 수면제를 과다하게 먹고 잠드는 나날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냥 자는 듯이 죽으면 내일이라도 상관없는데 죽지도 않고 알콜성 알츠하이머라도 걸려서 사람들을 마냥 귀찮게라도 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네요. 한심하게도.
겨우 한다는 노력이 자낮주인공이 구원받거나 치유받은 내용의 이야기들을 찾아본다는 거예요. 차라리 힘내서 복수하는 얘기라도 보면 좋으련만. 마침 그런 내용의 신작이 나왔는데 보려다가 실패했습니다. 주인공의 의지는 좋았는데 그 과거가 제 과거까지 건드려 그전까지 없던 우울삽화가 나오게 되어버렸어요. 정신만 차려보면 어느새 열여덟, 열아홉의 혼자이던 어느 순간에 자꾸 서 있더라고요.
이혼당하면 어쩌죠
혼인신고서를 끼워둔 시집을 그냥 보는 책인 척, 손 닿을 수 있는 머리맡에 두고 자고 있어요.
이직준비로 잠시 일을 쉬고 있는 배우자가, 이대로 취직하지 말고 내가 번 돈으로 먹고살았으면 좋겠다는 나쁜 생각을 합니다. 못된 생각인 거 아는데 자꾸 떠난 사람들에게 시달려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요새 부쩍 늘어난, 아무도 없이 혼자였던 과거의 어느 날들이 먼지처럼 주변을 떠다녀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재채기하듯 반응하다 보니 비이성적 생각 속에서 계속 허우적대요. 이혼 서류와 덩그러니 혼자 남을 것만 같은 상상이 공포가 되어 정신 차려보면 어느샌가 사로잡혀있어요. 기억과 환영이 번갈아가며 저를 홀리나 봐요.
수면이 더 늘어 일하는 시간만 멀쩡한 척 겨우 버티고 계속 자고 있어요. 바꾼 수면제가 별로 안 듣는지 근래는 잠귀가 더 밝아져 신생아도 아니고 두어 시간에 한 번씩 계속 깨니까 그렇게 자는데도 피곤합니다.
틀어놓은 토크쇼에 어떤 연예인이 나왔네요.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어떤 기분인지 묻는 질문에 농담을 곁들여 대답하며 웃고 있습니다. 화면 속 사람들 전부 다 웃는데 저는 웃을수가 없었어요.
좋겠어요. 당신은,
자신으로 사는 게 좋아서.
나는
나, 로 사는 게 이렇게도 괴로운데.
나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다 생각될 정도로.
울고 싶어 졌어요.
여전히 웃고있는 당신이 부러워서요.
순식간에 우울이가 곁에 왔어요. 얼굴은 비 오는 거리가 되어가요. 죄다 범람해서 아이라인이 무너진 둑처럼 흐르기 전에 티슈라도 덮어야겠습니다. 어제와 별 차이 없는 오늘은 이만 할게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