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와 F
"MBTI 그게 뭔데?"
MBTI가 막 유행하기 시작한 때에 친구가 보내주었던 URL을 타고 들어가 처음 MBTI 검사를 해보았다. 당연히 재미 삼아하는 테스트지만, 그다지 그런 일반화(?)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 크게 와닿지 않아 했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내 MBTI가 뭐라고 했었지?"라며 도리어 친구에게 묻기를 부지기수였다.
이런 내가 갑자기 MBTI에 과몰입하게 된 이유! 알고리즘에 의해 우연히 보게 된 너덜트 유튜브 <너 그거 INFP라 그래>. 시청하는 내내 '어머, 누가 내 얘기를 해?' 조금씩 나도 MBTI에 스며들고 있었다.
* INFP의 특징(출처: 나무위키)
- 자기중심적이다.
-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상상을 선호한다.
- 조직사회 내에서 암묵적으로 따르도록 요구되는 룰에 구속당하기 싫어한다.
- 전통이나 관습을 싫어하고 창의력이 뛰어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보를 잘 수용하는 편이다.
- 호기심이 많고, 어떠한 일의 결과보다 '가능성'을 보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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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종종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게 되는데,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자정을 넘기도록 몇 시간씩 논쟁하는 일이 많았다. '돌림노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하면 할수록 서로가 지치는 상황. 우리의 말다툼을 한 예로 들면 이런 식이었다.
캠핑을 하는 우리. 예약이 치열해져 좋은 캠핑장에 가려면 몇 달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데, 남편은 여러 가지 비교하고 고르는 것을 잘하지 못해 대부분 내가 캠핑장을 찾아보고 예약을 한다.
나 "이날 캠핑장 예약했어!"
남편 "와, 어디?"
나 (해변 앞 캠핑장 사진을 보여주며)"여기 노을 지는 게 엄청 예쁘대. 너무 좋을 것 같아."
남편 "응? 모래사장 아니야?"
나 "응 맞아. 데크보다는 지저분해질 수도 있긴 한데 아무튼 여기 너무너무 예쁜 것 같아."
남편 "비가 오면 어쩌려고?"
나 "비? 많이 온다 그럼 안 가면 되지?"
남편 "우리는 비 맞으면 절대 안 되는데(대부분 우드 제품을 사용)..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지."
나 "근데 안 올 수도 있잖아? 그리고 혹시라도 오면 그때 도망 나오면 되지."
남편 "아니지. 그러니 애초에 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예약을 해야지."
나 "항상 데크만 갈 수도 없잖아? 그리고 맑을 수도 있는데 비 올 생각에 미리부터 안 가?"
남편 "그래도 최대한 우리가 피해야 할 조건은 피해서 해야..."
나 "나는 수십 개중 비교하고 비교해서 하나 골라온 거야. 우리가 안 가본 곳 중에서 뷰도 좋고, 데크로 되어 있고, 가깝고, 시설 관리 잘 되어 있고... 그런 조건으로 오빠가 그럼 찾아보면 되잖아? 지적은 나도 잘할 수 있어!"
남편 "내가 지적을 한다는 게 아니라, 예쁜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 그런 부분도 고려하자고 얘기하는 건데. 그럼 나는 안 찾아봤으니까 아무 소리하지 말고 무조건 따라가면 되는 거야?"
나 "오빠가 내 노력은 생각도 안 하고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지! 됐어. 그냥 취소할게."
애써 찾아보았는데 말 꺼내기가 무섭게 지적을 당하니 서운한 마음이 와락 쏟아졌다. 무튼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나는 예쁘고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좋아해 그것에 포커스를 두고 행동하는 편이다. 캠핑뿐만 아니라 물건을 사거나, 여행을 준비하거나 거의 모든 면에서. 그런 나와 반대로 남편은 예쁜 것보다는 실리적인 것. 감성적인 것보다는 이성적인 것을 우선 생각하고 어떤 일에서도 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선택하는 편이라 제약이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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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그렇게 안 하겠다고 귀찮아하던 MBTI 검사를 남편에게 시켰는데, 현실주의자 'ISTJ'가 나왔다. 특징을 하나씩 불러주니 자기가 맞는 것 같다며 남편도 슬쩍 공감을 하기 시작했다.
* ISTJ의 특징(출처: 나무위키)
- 선입견이 강하다.
- 주어진 업무나 책임을 끝까지 완수한다.
- 원리, 원칙적이다.
- 논리적, 합리적인 것을 중시하지만, 구시대적인 관습을 논리에 따른 판단 없이 수용하는 편이다.
- 직설적인 표현을 많이 하는 편이다.
나와 I 빼고는 전부 다르다. 남편은 매사에 나를 설득하고자 원리, 원칙에 대해 많이 주장해 왔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꽤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왜 맨날 혼내기만 하느냐고! 나란 사람은 원리, 원칙보다는 감정이 먼저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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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무슨 대화를 하다가 내가 남편에게 "안 혼나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니 남편은 "혼내는 거 아니야. 내가 ISTJ라 그래."라고 답했다. 웃기네 정말!
그런데 남편의 MBTI를 알고 나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우리 두 사람은 그냥 애초에 사고 회로가 다르다는 것을!
MBTI가 정확히 나를, 나의 남편을 정의 내려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아주 살짝은 이해하게 되었다. '내 생각이 이렇다고 꼭 오빠도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구나...'
현실주의자 ISTJ 남편과 중재자 INFP인 내가 여태까지 해오던 것보다는 조금 덜, 치열하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