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여행이 좋은 이유

방콕 하지 말고 방콕 가세요

by 피츠로이 Fitzroy


내가 지금 사는 지구의 세계는 참으로 역사가 긴 세계인데 내 삶은 (대략 80년 산다 치면) 정말 보잘것없이 짧다.
100년 전에도 태어났다 죽은 사람이 있고 1000년 전에도 태어났다 죽은 사람이 있으니 정말 무수한 인간들이 태어났다 짧게 살다, 죽는다. 오래된 이 세계에서 짧게나마 내게 삶(생명)이 주어진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거겠지.

그러면서도 유한한 나의 삶에는 어쩐지 아쉬움이 느껴진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약간의 슬픔도.


생각해 보면 나는 이 크고 오래된 세계에서 먼지보다도 더 작은 구성요소일 뿐이고, 심지어 구성요소로서의 존재로도 1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며, 아주 잠시 이 지구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나의 슬픔, 분노, 절망, 고통, 원망 등은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니다.

내 마음에서 감정의 북이 둥둥 울리고 거센 파도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면, 금방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슬프고, 때론 우울하고, 어떤 땐 화가 나는데

오래 가지고 있을수록 그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일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들 기쁨, 친절, 배려, 사랑, 용서가 내 짧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다.
더 많이 웃자. 즐거운 일은 더 많이 하고, 맛있는 것은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여행하자. 즐겁고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살자. 그래서 내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즐겁게 살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잘 생각해 봐. 심각해질 필요 없어. 삶도 즐길 시간도 아주 짧다고. 언제까지 심각할 거야.


-2019년 3월 8일 20:58분 서울에서 방콕 가는 비행기 안에서 (모두가 자는 데) 갑자기 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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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이튿날, 여행 온 것 같지 않게 한국 일상처럼 모닝커피를 마시고 싶어, 수정이가 알려준 엠포리움 백화점 4층 푸드 코트에 갔다.
아이스 카페 라테를 테이크 아웃해서 마시려고 몇 군데 카페를 둘러보았다. 스타벅스가 보였지만 한국에서 먹는 아이스 카페라테가 너무 밍밍했다는 생각이 들어 제외시키고, 한국에서 못 보던 곳에서 주문을 했다. 서양인들이 꽤 있어서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145바트. 계산을 치르고 뭔가 비싸지 않나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해 보니 5,200원 돈. 우리나라에서 사 먹는 커피보다 더 비싼 커피를 태국에서 주문했네. 하아 역시 나는 골라도 고급진 데를 골라. 웃고 있는데 슬픈 기분.

The mandarin oriental shop. 비싼데 맛은 또 그냥 그런 아이스 라테를 들고 고급져 보이게 걸어 돌아왔다.


-2019년 3월 9일 13:16분 방콕에서도 나는 호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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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3년 만에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내리자, 동남아시아 특유의 그리웠던 그 냄새가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이 후텁지근한 공기. 아 왔구나.
오늘 늦은 아침, 방콕의 거리를 나서니 이 날씨와 이 냄새와 이 공기가 너무 좋아서 ‘좋다아아아’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이 날씨 어디랑 닮았는데, 이 느낌 어디랑 닮은 거지.... 하다가 떠올린 게 인도다.
한 달간, 인도 배낭여행을 하며 느꼈던 어느 날의 아침이다. 매일이 새롭고 두려웠던 날들. 인도에 가고 싶어 졌다.


-2019년 3월 9일 15:01분 인도에 죽기 전에 다시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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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 BTS(지상철)를 탔다. 방콕에 많이 왔음에도 BTS는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다. 처음 타서 긴장했지만 스스로에게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잘 해냈다.
BTS의 풍경은 우리나라랑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아니, 우리나라보다 훨씬 좋은 점도 보이고, 배웠으면 좋겠다 생각한 부분도 많았다.
전철 밖 스치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물이 났다. 난 방콕에 오면 이상하게 잘 운다. 왜 우는지 몰라 나도 어이가 없다.
예전에 첫 직장인 JYP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방콕에서 울면서 였고, 해외 나가는 비행기 한 번 못 타고 돌아가신 엄마 생각나서 펑펑 운 것도 방콕이었는데, 이젠 이렇게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도 눈물이 나네. 방콕은 분명 나의 눈물샘을 찾아 건드리는 도시다.


-2019년 3월 11일 11:48분 내가 잘 우는 건 나이 먹는 탓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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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다니다 보면 아 진짜 왜 저러지 미간이 확 구겨지는 사람도 만나지만, 와 어떻게 저런 인성과 남다른 매너로 점철된 사람이 다 있지 싶은 사람도 만난다.
나는 주로 그런 사람을 호텔에서 보고, 내 경우에는 서양 남자 쪽에서 많이 봤는데, 태어나서 부터 몸에 밴, 아니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 같은, 훌륭한 매너와 레이디 퍼스트(여성 보호) 정신이 인상적이다.
난 한국적 기질(혹은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탈 때도 제일 먼저 타야 하고, 내릴 땐 제일 먼저 내려야 하며, 조급, 불안, 초조를 감추지 못하고 돌아다닌단 말이지. (얼굴에 나타남)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입장이었고, 그는 내리는 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많은 사람이 다 내릴 때까지 문이 닫히지 않게 버튼을 눌러 주었는데, 거기까진 그래 그럴 수 있어, 그 정도 하는 사람은 꽤 있지. 그런데 나를 발견하곤 아, 이 숙녀 분이 타시려는 모양이네 하고 내게 들어오란 눈빛을 보내며 내가 상자 안에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잡아 준 후, 그다음에 본인이 내렸다. 무거운 가방도 들고 있어서 손도 부족한데.

와, 나는 좀 감동했다. 이런 건 시킨다고 해서 금방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들어오는 사람까지 챙기고 나서 비로소 본인이 나가는 캐리어 끈 사람은 처음 봤다. 나는 못 내릴까 봐 (다시 그거 타고 올라가게 될까 봐) 그런 여유와 우아한 동작은 가진 적도 해 본 적도 없다. 반성합니다. 여행을 더 자주 다녀야 한다. 이런 것들을 보고 배우려면. (밖에 나가려는 핑계)


-2019년 3월 12일 친구 잘 둔 덕에 비싼 호텔에서 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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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도 안 뜬 새벽에 떨어진 인천공항. 서서히 아침 해는 뜨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잠 기운에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고 몽롱한 상태로 있었다. 커피와 빵을 파는 곳에 들어가 진한 커피와 함께 크로와상을 먹으며 조지 손더스의 소설 바르도의 링컨을 읽고 있었다. 집에 데려다 줄 하남행 공항버스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하, 아직도 1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하다니 기운이 빠지던 찰나, 갑자기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명곡 중의 명곡이다) ‘해피투게더'가 매장에서 흘러나왔다. 아 이 기막힌 선곡 이 타이밍. 아침부터 행운이다, 그리고 행복하다.


-2019년 3월 14일 06:10분 귀국이라니 생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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