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해가 지기 전에 다 집으로 돌아갔다. 해가 지고서도 유치원에 남아있는 건 나랑 동생뿐. 유치원은 오전반, 오후반, 그리고 종일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와 동생은 아침에 와서 밤까지 남아있는 ‘종일반’에 소속된 유일한 멤버였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유치원에 단둘이 남아있는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웠다. 낮 동안의 왁자지껄함도 사라지고, 선생님들도 다 퇴근을 하고, 우리의 놀이방은 둘만 있기엔 너무 넓었다. 왜 우리만, 모두가 떠난 휑뎅그렁한 이 공간에 남겨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손이 저렸다. 후이는 나의 외로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방차를 끌며 계속 이상한 소리를 냈다.
“푸쉬, 푸쉬, 불이 났습니다, 웨에에에에엥.”
울고 싶었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달래 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만두었다.
‘후이야, 엄마 아빠가 우릴 버렸지만, 내가 널 끝까지 지킬게.’
밤 8시가 넘어서야 원장 선생님이 봉고차를 유치원 앞에 대고 우릴 불렀다. 나는 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놀이방을 마지막으로 나오며 형광등 스위치를 끈다. 그리고 아주 잠깐 깊은 어둠에 갇힌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난 본능적으로 뭘 잘 훔쳤다. 친척 집에 놀러 가면 때를 가늠해 사촌 언니의 빈방으로 살며시 기어들어 갔다.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서랍을 열자 여러 가지 모양의 필통들이 줄을 맞춰 가지런히 누워 있고, 필통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예쁜 것 투성이었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의 펜들, 연필심을 끝까지 뾰족하게 깎아 놓은 연필, 동물 모양의 예쁜 지우개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연필 한 자루를 빼서 바지 주머니에 쓰윽 집어넣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빠 회사 동료의 집에 가서도 몰래 빈 방으로 들어가 본다. 서랍장을 열어보니 반짝거리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큐빅이 가득 박힌 머리핀, 투명한 참이 몇 개씩 달린 팔찌, 핑크색 폼폼이 붙어있는 머리 고무줄 같은 것들이 눈이 핑핑 돌아가게 예뻤다. 나도 모르게 팔찌 하나를 들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서랍을 조심스럽게 닫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스르륵 방을 빠져나왔다.
내가 사는 집에서 5분쯤 걸으면 쌀집이 나왔고, 그 옆이 태권도 도장, 그다음이 슈퍼였다. 좁고 어둡고 습한 동네 구멍가게였지만, 나는 그 슈퍼를 우리 집처럼 자주 드나들었다. 엄마가 후이를 데리러 태권도 도장에 다녀오라고 하면, 슈퍼 앞 가판대에 매달린 사탕들에 정신이 팔려 후이가 나오는 시간을 놓치곤 했다. 슈퍼 주인아줌마는 엄마랑 똑같은 뽀글거리는 파마를 하고, 엄마랑 비슷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잘 몰랐다. 아줌마는 손님이 와도 절대 슈퍼 안에 딸린 작은 살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안에서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실눈을 뜨고 손님의 움직임을 쫓을 뿐이었다. 내가 들어가면 “유영이 왔냐, 엄마 잘 계시지?”하고 말했는데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 집에서 습관적으로 초콜릿을 훔쳤다. 초콜릿이 놓인 진열대는 방 안에 앉은 아줌마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그래서 한 번도 걸리지 않고 같은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 슈퍼 안을 한 바퀴 빙 돌면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직사각형 모양에 두께는 얇고 고동색 종이로 둘러져 있는 초콜릿 앞에서 멈췄다. 재빠르게 하나를 집어 윗도리의 긴팔 소매 안으로 쑥 밀어 넣는다. 초콜릿이 팔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고 나면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다. 슈퍼에서 나오면 그 길로 냅다 달렸다. “유영이 가니?”하고 멀리서 들렸지만 멈추지 않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사실에 유쾌해졌다.
그날도 다른 날과 별다를 게 없었다. 10분 후면 후이가 태권도 도장에서 나올 거고, 나는 슈퍼에서 구경을 하며 기다리다 후이가 나오면 녀석의 손을 잡고 집까지 끌고 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욕심이 생겼다. 평소 같으면 동생을 기다리는 날은 초콜릿을 훔치지 않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간단히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초콜릿을 하나 집어 소매 안으로 완벽히 밀어 넣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해보지도 않은 여유를 부렸다.
“아줌마 저 이제 후이 데리러 가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꾸벅했는데 갑자기 초콜릿이 툭 하고 앞으로 떨어졌다. 오래된 옷이라 소매가 헐거웠던 것이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앞만 보고 내달렸다. 아줌마에게 붙들릴까 봐 무서웠다. 뛰면서 엄마에게 매 맞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지, 너는 아주 나쁜 아이야.’하며 자책했다. 풀이 잔뜩 죽어 집으로 돌아갔는데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직 아줌마가 이야기를 못 한 것 같았다.
나는 며칠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후이를 데리러 가지 않았고, 슈퍼 쪽으로는 지나가지도, 아니 고개조차 그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매일이 지옥 같았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누구 하나 초콜릿을 훔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슈퍼 아줌마는 예전부터 나의 범행을 눈치채고 있었던건가? 나를 생각해서 눈감아 준 건가?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데도 아무도 나에게 꾸중을 하거나 벌을 주지 않는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누구 하나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생각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 나뿐이었다. 세상이 등 돌린 것 같은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이후로 초콜릿을 훔치는 일은 다시 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짓도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