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10살이 되었을 때, 엄마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도 특별한 이유 없이.
나는 계속 엄마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학교에서 친 시험지의 점수 옆에 엄마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꼭 그런 걸 시켰다.
엄마의 기분이 아주 좋거나, 엄마가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일 때 사인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엄마는 아빠 사무실에서 경리 일을 봐주는 언니와 함께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운데 꽃이 그려진 둥근 앉은뱅이 상이 싱크대 앞에 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냄비가 상 가운데로 올라왔을 때 나는 재빨리 시험지를 엄마 앞에 밀었다. 밥 먹는 자리고 언니도 함께 있으니 화낼 수 없는 좋은 타이밍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시험 점수를 눈으로 좇고, 미간을 한 번 찌푸리더니 셋이 둘러 앞은 밥상 앞에서 시험지를 북북 찢어 휙- 하고 날렸다. 마술사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갈기갈기 찢긴 시험지가 허공에서 나풀나풀 나는 모습은 분명 마술사가 날리던 꽃가루와 닮아 보였다.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옆에 앉은 언니가 안 됐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무슨 죄래. 그런데 라면 냄비는 원래 저렇게 안 예쁜 갈색이었나.
“이걸 점수라고 받아왔어?”
나는 고작 두 문제를 틀려 80점을 맞았다. 80점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엄마를 잘 알고 있다. 결국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엄마는 그냥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싹싹 쓸어 흩어진 시험지를 한데 모았다. 내일 선생님한테 가져가야 하는데 어떡하나. 테이프로 다시 붙이면 멀쩡해지려나. 시험지 찢었다고 선생님한테 혼날 텐데. 엄마 사인 못 받았다고 어떻게 이야기하지…..
「닥터슬럼프」라는 만화영화에는 ‘아라레’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나온다.
나는 꽤 공부를 잘했다. 10살 때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가 어딨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난 반에서 1등을 하기 위해 과외를 받았다(이런 걸 엄마의 극성이라 하나). 과외 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맨날 1등 하는 아이의 엄마였다. 난 우리 반 1등 아이의 집에서 그 아이의 엄마와 공부를 했다.
내가 그 집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 건넌방에선 여러 아이들이 모여 앉아 닥터슬럼프를 보고 있었다. 나도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슬쩍슬쩍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가곤 했는데 기본적으로는 나는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문제집을 푸는 시간이니까.
과외를 받으러 가는 길은 항상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 집까지 가는 길은 끝도 없이 펼쳐진 미로를 헤쳐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골목이든 똑같이 생긴 집이 몇 채씩 있어서 길을 제대로 찾기가 힘들었다. 한 번은 골목에서 무섭게 생긴 검둥개가 뒤를 쫓아와 엉엉 울면서 달리기를 했다. 내가 달리니까 개는 더욱 흥분하여 전속력으로 날 쫓아왔다. 저 개에게 물려 오늘 죽는구나 싶었다. 개는 영원히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은 과외하는 곳에 후이를 데리고 갔다. 동생은 그곳에서 형들과 닥터슬럼프를 보다가 바지에 똥을 쌌다. 창피했는지 말도 안 하고 계속 가만히 있었다. 그날 그곳에 있던 모든 애들이 후이가 똥을 쌌다며 큰소리로 놀리기 시작했고,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후이의 팔을 잡고 집까지 한 번도 안 쉬고 뛰어서 왔다. 후이는 팔이 너무 아프다고 울었는데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울었다.
다음번 시험에서 1등을 했다. 항상 우리 반 1등이었던 그 친구는 나 때문에 2등이 되었다. 1등을 해서 기쁜 것보다, 이제 그 친구 집에 가서 그 친구 엄마와 문제집을 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너무 기뻤다. 걸을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그 집 마루 위에서, 수평이 안 맞는 평상에 앉아 1시간 꼬박 문제집을 푸는 일을 이제 안 해도 된다고.
처음으로 (우리) 집에 편히 앉아 닥터슬럼프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거기에 나오는 안경 낀 여자아이의 이름이 ‘아라레’라는 것을 뒤늦게, 1등 하고 나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