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외로운지 그때 배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녀로부터 배웠다.
집에서 맏이인 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2학년 선배만 보아도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러니 3학년은 오죽했겠는가.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수험생’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것만으로도 존경심이 절로 생기고 위대해 보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3학년이었다. 우리는 체육대회 준비를 위해 처음 만났다. 각 학년의 같은 반끼리 한 팀이 되는 형식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1학년 1반이었기 때문에 2학년 1반, 3학년 1반 선배들과 한 팀이었고, 우리는 연습을 위해 자주 만나야 했다. ‘놋다리밟기’라는 들어본 적도 없는 생소한 종목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운동장에 있는 그녀가 눈에 띈 것이다.
친구들 틈에 섞여 있어도 그녀는 뚜렷이 구별됐다. 마른 체형에 특히 다리가 가느다랗고, 손가락은 더 긴 것 같았다. 전체적인 비율로 따지면 그랬다. 얼굴이 창백한 건지 투명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안에 핏줄이 훤히 다 드러나 보였다. 그 외 교복을 입은 차림이나, 머리 스타일 등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누가 보기
에도 명백한 불량 학생이었다. 머리카락은 염색을 자주 해 얼룩덜룩했고, 주로 많이 보이는 색은 금색이었는데 어떤 때는 은발로 보이기도 했다. 교복 치마는 무릎 위로 한참을 올라가, 몸에 딱 붙어있었다. 하지만 워낙 말라서인지 섹시한 느낌은 없었다.
그녀가 체육대회 연습을 나오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혼자서만 늦게 나오기도 했고, 어느 날은 아예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나기 시작했고,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도 커졌다. 공부보다, 지금껏 해본 적도 없는 놋다리밟기 연습에 열성으로 임했다.
그녀가 나온 날은 너무 신이 나서 가만히 있어도 발이 저절로 움직였고, 그녀가 나오지 않은 날은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는 데 마음이 슬퍼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이 넓은 학교에 나 혼자인 듯 외롭고,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게 너무 억울해서 큰 소리로 울고 싶었다. 뒤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붉은 노을을 끝도 없이 만들고 있었다.
아침부터 운이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 있었다. 등굣길에 그녀와 마주친 날. 아침 자율학습을 마치고 이동하는 3학년 무리와 마주친 것인데, 이때가 기회다 싶어 눈을 크게 만들어서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녀를 보았고 기어코 그 앞에 가
서 인사를 했다. 인파를 헤치고서.
“안녕하세요......”
“안녕.”
그녀는 절대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매번 그랬다. 내가 인사하면 방금 전에도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웃어주었다. 아주 살짝 짓는 미소. 그 미소가 소름 끼치게 좋았다.
아침에 그렇게 마주친 후부터 등교할 땐 일부로 3학년 건물 쪽으로 빙 돌아서 갔다. 그래도 못 만나면, 반 친구 몇 명과 간식을 사서 3학년 교실로 직접 찾아갔다. 같이 놋다리밟기 연습을 몇 번 하면서 선배들과는 꽤 친해져 서로 먹을 것을 주고받기도 했다. 빵이랑 우유, 과자 같은 걸 건네는 찰나에도 나는 교실을 재빠르게 훑으며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체육대회 연습뿐 아니라 학교에도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저녁 청소시간에 소각장에서 본 이후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자처해서 쓰레기를 버리러 다녔다.
‘쓰레기를 버리러 왔어! 청소도 하는구나!’ 그녀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녀의 소식은 선생님을 통해서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우리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그녀의 담임이었는데, 우리 반에서 수업하는 중에 자기 반에 이런 아이가 있는데 참 걱정이라며 한숨을 내뱉곤 했다. 그녀를 지도하느라 얼마나 힘든지, 그녀가 얼마나 다양하게 말썽을 부리는지 이야기했다. 그녀의 이야기
를 누군가를 통해 들을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오늘은 이야기를 안 해주나 기다리기까지 했다. 학교에서 근면 성실의 아이콘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하는 것 같은 그녀가 멋져 보였다.
체육대회가 열린 날은 집에 훔쳐 가고 싶은 예쁜 구름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날이 끝나면 더 이상 그녀를 못 볼 것 같은 생각에 사실 기다리지 않았던 날이었다. 우리는 2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체육대회가 끝날 때쯤 놋다리밟기를 함께 한 3학년 선배들한테 뒤풀이를 가자는 뜻밖의 제안을 들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다.
열 명도 넘는 여고생들이 저렴한 피자를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에 모여 앉았다. 메뉴판 맨 앞장에 ‘피자 리그’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나는 친구들이랑 이미 자주 와봤던 곳이었다. 1, 2, 3학년 모두 섞여 테이블을 몇 개씩 이어 붙여서 좁게 앉았다. 기대와 달리 그녀는 피자를 먹으러 오지 않았다. 실망한 나머지 씹고 있는 게 피자인지 돌인지 모를 기분이었다.
2차로 노래방에 가자는 의견이 모였지만, 그녀가 없는 이상 나는 어떤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친구들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노래방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거짓말같이 그녀의 얼굴이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 방의 작은 유리창으로 쓱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너무 떨려서,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남 귀에 들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녀는 일행이 있었다. 다른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무리가 복도에 보였다. 진한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로 한껏 멋을 부린 탓에 교복이 아니었으면 학생이라는 것은 영원히 알 수 없을 듯했다. 그 뒤에 또 다른 두어 명의 남학생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들의 모습은 내 쪽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일행들의 불량스러움에 비하면 나의 그녀는 아직 학생 다움이 곳곳에 묻어있는 귀여운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친구들을 돌려보내고 혼자서 우리가 노래하고 있는 방으로 슬쩍 들어왔다. 나는 그녀 쪽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녀가 ‘놀랐지!’ 하며 싱긋 웃고 들어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어떻게 왔어?”
3학년 선배들이 반갑다고 머리를 통통 쳤다.
그녀는 말 수가 별로 없어, 우리 사이에도 짧게라도 대화가 오고 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했을 때 최선을 다해 싱긋 미소 지어주는 그녀의 얼굴을 너무나 잘 기억할 수 있었다. 눈이 얼마만큼 작아지고 입꼬리가 얼마큼 올라가는지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얼굴을 정말 좋아했으니까.
그녀가 리모컨으로 선곡을 하고 이내 마이크를 잡았다. 가수 이소은의 ‘서방님’이란 곡이었다. 가사도 평범하지 않았지만, 가수 특유의 가녀린 목소리가 돋보이는 곡이라 그때 그녀의 노래를 완벽히 기억하게 됐다. 이소은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는 걸 보며, 사람을 보고 끼가 있다고 하는 건 이런 걸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주로 수줍어하는 쪽이었던 그녀의 평소 모습과 전혀 다른 당당함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다음에 노래방에 가면 꼭 ‘서방님’을 예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름방학에도 수능 준비를 하는 3학년을 위한 보충 수업이 있었지만, 그녀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3학년들의 보충 수업 기간 동안 나도 내 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로 굳이 학교에 나와 그녀를 기다렸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길 하염없이 기다리던 지루하지만 떨렸던 수많은 시간들.
석양이지는 붉은 하늘 밑에서 자주 오지 않는 버스를 오랫동안 기다리며, 괜히 아무 잘못 없는 버스 표지판을 발로 툭툭 찼다. 울고 싶었는데 이를 악물어 참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대체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 거지.
날이 많이 춥다며 꽁꽁 싸매고 학교를 다니다 보니 그녀가 졸업하는 날이 왔다. 졸업식이 있는 날은 항상 왜 그렇게 추운 걸까, 발이 너무 시렸다. 학교 규정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단정하고 딱딱한 검정 구두 안의 열 개의 발가락들이 몇 시간 전부터 고통을 외치고 있었다. 추우면 자연스럽게 발을 동동거리게 된다.
영하 속 추운 날씨에도 굳이 건물 밖에서 어슬렁거렸던 이유는, 혹시나 그녀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졸업 축하한다고 말 한 번 전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얼음이 얼어 시린 발로 미끄럼을 타면서도 쏟아져 나오는 졸업생들의 얼굴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도 기다린 게 티가 나면 안 되니까 미끄럼 타는 데 집중해 본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구두코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같은 학교에서 볼 수 없게 된다. 프랑스어 선생님이나 다른 선배들을 통해 가끔 듣던 그녀의 이야기도 이젠 들을 수 없겠지. 발의 감각을 잃어가며, 하얀 입김을 쏟아내며, 차갑고 달큼한 공기 안에서 그렇게 그녀를 보내 주었다. 1년간 짝사랑했던 아름다운 그녀를. 나와는 너무 달랐던, 그래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던 그녀를.
나중에 집 앞에 그녀의 이름을 붙인 교회가 새로 생겼는데, 그 교회 앞만 지나가도 그녀가 생각나면서 행복해졌다. 신실교회. 신실 언니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