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를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엄마를 떠올리면 머리가 아프다고 자주 누워 있었던 게 제일 많이 생각난다. 두통이 자주 그녀를 괴롭혔다. 내가 옆에 있으면, 아픈데 정신 사나우니까 좀 나가 있으라고 했다.
학교에 다녀와서 책가방을 벗자마자 주방에 선 엄마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허리를 둘러 안고 오늘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조잘거리면, 알았다고 엄마 밥하니까 저기가 있으라고 했다.
“아이고 우리 딸 그랬어?” 이 한마디가 듣고 싶었는데 엄마는 자꾸 나를 물리쳤다.
사랑받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에 카드 한 번만 써달라고, 아니면 그냥 편지라도 괜찮으니 그거라도 한 번 받아보자 애원해도 그 한 번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김없이 새 학기가 시작되자 새 담임 선생님은 호구조사를 했다. 빈 용지를 나눠주며 주소를 적고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모두 적고, 옆에 나이와 직업과 최종학력을 적어오라 했다. 그 용지를 가져와서 엄마에게 내미니 엄마는 언제나처럼 아빠 고졸, 엄마 고졸에 동그라미를 쳐서 돌려줬다.
아빠는 목표했던 서울대 법대 진학에 한 번 떨어진 후 대학 가는 걸 포기하고 무작정 무전여행을 다녀왔다고 내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좋았단다. 그런데 엄마한테는 한 번도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 쪽에서도 별로 궁금하지 않은 체했다. 다정하게 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항상 허전했던 마음은 어느샌가 엄마에 대한 미움으로 채워졌다.
그런 어느 날 엄마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자기 얘길 던지며 들어왔다. 그렇게 처음으로 엄마의 고백을 들었다.
엄마에겐 위로 오빠가 두 명, 아래로는 여동생이 3명이 있었으니, 여자 자식들 중에는 장녀였다. 오빠들은 집안을 일으켜야 할 사람이라 공부를 아니 공부만 해야 했고, 엄마는 밑으로 터울이 많이 나는 여동생들을 돌보고, 또 일찌감치 돈도 벌어야 했다. 엄마가 하고 싶은 건 공부였는데 말이다. 집에서 중학교도 안 보내 준다는 걸 겨우 우겨서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엄마를 외할아버지는 끝까지 외면했다.
“여자가 배워서 뭐하냐.”
결국 집안을 일으켜 세운 건 오빠들이 아닌 엄마였다. 집에 돈을 들고 오는 건 엄마였고, 엄마가 옷가게에서 밤낮으로 일해 번 돈을 집으로 가져가면, 그 돈은 고스란히 헌금이라 명목으로 교회로 들어갔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때부터 엄마는 교회가 싫어졌다고 했다.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고. 사는 게 지긋지긋했다고.
“엄마는 그래서 유영아, 엄마는 실은 중학교밖에 못 나왔어. 엄마는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 공부를 못했어......”
이야기를 잇지 못하고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움찔했다. 그렇게 엄마가 고졸이 아니라 실은 중졸 이란 고백을, 그때 처음 들었다. 엄마가 고졸에 동그라미 칠 때 한 번도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내 앞에서 울면서 자기 이야기를 꺼낸 엄마는 처음이라 어쩔 바를 몰랐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어중간한 거리에서 어색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실은 너무 아는 척하고 싶었는데, 엄마의 슬픔을, 엄마의 눈물을, 아는 척하고 싶었는데, 엄마에게 배운 적이 없는 위로를 그녀에게 나눠주기가 힘들었다.
손을 잡아 주며 괜찮다고 한다던지, 눈물을 닦아 주며 말없이 안아 준다던지, 아니면 휴지라도 건네주는 것이 맞았다고 밤새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후회하면서도 끝까지 모른 척한 게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