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_군대로 도망친 동생의 의미

by 피츠로이 Fitzroy

후이는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아들을 좋아했던 시아버지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엄마의 보배가 후이였고, 약하게 낳았는데 천식까지 걸려서 밤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컥컥거리는 걸 응급차에 실어 몇 번씩이나 날라야 했던 아이가 후이였다. 엄마는 그때마다 애간장이 녹았다 했다.

유치원 다닐 무렵엔 인형같이 예쁜 얼굴로 모델을 시키라는 제안을 여기저기서 받기도 해 엄마의 어깨는 항상 힘이 들어가 있었다. 엄마는 후이를 명성 높은 사설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새벽이슬을 맞으며 밤새 줄을 서고 왔었다.

엄마에게 내가 후이와 공평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후이를 한 번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후이가 남들보다 모자란 부분이 내겐 더 많이 보였고 그 모자람을 내가 채워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늦은 밤까지 둘만 덩그러니 유치원에 남겨졌을 때, 그때 처음으로 내가 후이를 돌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초등학교 처음 가는 날도 그랬다. 후이는 1월생이라 학교를 일찍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학년 친구들과 비교해 개월 수가 적었는데, 모자란 건 개월 수뿐 아니라 몸집도 또래보다 작았고 다리도 너

무 가늘었다.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다리로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녔다. 교과서를 넣은 책가방을 매려면 뒤쪽으로 몸이 크게 휘청했고 그때마다 나는 뒤에서 녀석의 가방을 잡아 주어야 했다. 후이가 가방을 멘 건지, 가방이 후이를 멘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그러더니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녀석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교실 실내화에는 낙서가 잔뜩 되어 있고, 교복 셔츠는 잃어버렸다고 하여 몇 번인가를 다시 샀다. 도대체 교복 셔츠를 어떻게 하면 잃어버릴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교과서까지 찢어진 걸 발견하고 답답해진 나는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후이 학교에서 애들한테 괴롭힘 당하는 거 같은데.”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자기도 답답하다고 엄마가 말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아이들의 장난을 어떻게 멈춰야 할지, 마음 같아선 당장 쫓아가서 펑펑 때려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밤새 뒤척거리기만 했다. 부디 후이가 잘 견뎌낼 수 있기를 바랐다.

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안 돼 엄마가 떠났고, 나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에 녀석이 삐뚤어지지는 않을까 늘 조바심 속에 지냈다. 엄마가 없어도 괜찮겠냐고 직접 물어볼 수 없어서 녀석이 쓴 글을 훔쳐봤다. 그러다 갑자기 삭발을 하고 나타나거나 ‘하루에도 몇 번을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냥 외롭다.’라고 쓴 글을 발견하면 어쩔 줄 몰라 하루 종일 허둥거렸다. 녀석이 너무 일찍 외로움을 알긴 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매일 후이의 교복 셔츠를 다리며 겨우 고등학생인 동생에게 엄마가 빨리 없어진 것 같아 몇 번씩 어금니를 꽉 물어야 했다.

후이가 ‘누나 뭐 해줘’, ‘누나 나 뭐 때문에 힘들어’라며 붙임성 있게 말하는 아이가 아니라서 힘들었지만, 점심을 굶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큰 맘먹고 후이 티셔츠를 사서 책상 위에 몰래 올려놓았는데, 가격 택도 떼지 않고 서랍 안에 고이 모셔진 그 셔츠를 발견했을 때가 더 힘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어주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던 그때.

그러나 그 어떤 일들보다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후이를 억지로 등 떠밀어 군대에 보내야 했던 나의 23살 겨울이었다.

후이는 대학교 1학년 2학기 종강을 이주 앞두고 입대를 했다. 고등학교 내내 공부는 안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스타크래프트 게임만 죽어라 하길래 대학이나 가겠나 싶었는데, 스타크래프트로 영어도 배우고 스타크래프트로 게임의 원리를 파헤치더니 거짓말처럼 게임 만드는 게임공학과에 합격했다. 뭐 하나만 파다 보면 뭐가 되긴 되나 보다. 스타크래프트에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대는 등록금도 비쌌다. 나는 장학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나의 학비와 내 용돈을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었는데, 후이는 장학금까지 받을 만큼의 실력은 안 됐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만큼 싹싹한 성격도 못됐다. 집에서 보내 주는 적은 돈은 용돈 하기에도 부족했고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학비는 어떻게 충당했지만, 기숙사 비용이나 생활비를 바랄 수 없는 형편이라는 걸 깨닫더니 군대에 가겠다고 했다. 녀석은 군대를 도피처로 삼은 듯했다.

아빠는 진작에 이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가장 빨리 입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동생은 의무경찰에 지원하게 되었다. 2학기 수업을 채 다 마치기도 전에 무슨 도망이라도 가듯 그렇게 군대를 가는 꼴이 되었다. 나는 옆에서 적극적으로 돕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말리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거리에서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을 대신하여 기말시험 날짜에 맞춰 어느 교수에게 어떤 리포트를 보내면 되는지 확인하면서.

나와 아빠는 입소 당일 논산훈련소까지 함께 갔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감자탕을 셋이 조용하게 나눠 먹었다. 집합하라는 명령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와 같이 앉아있던 후이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긴

장한 모습이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괜히 꽉 쥐고 있는 손. 입을 꾹 다물었지만 안은 바싹 말라 있었을 것 같았다. 연병장으로 뛰어가는 후이의 뒷모습을 보며 말도 똑바로 못 하고 사람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어리숙한 동생이 군 생활을 잘 견뎌 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느껴지는 쓸쓸한 정적, 아무도 어떤 말을 꺼내지 않던 그때 내가 먼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

“군대를 너무 떠다밀 듯 보낸 것 같아서 그게...... 마음이 너무 안 좋아요.”

그 순간은, 아빠의 마음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 후이의 성적표가 집으로 배달되었는데 내가 대신 전달해준 리포트를 받은 교수는 F학점을 주었다. 본인이 직접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말 꼭 그래야만 했나요 너무 따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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