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설렘의 계절이다. 이유 없이 설레고 만다. 손목의 맥이 빠르게 뛰고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린다.
나는 일주일 내내 처음 듣는 수업에 들어간다. 강의실도 책상도,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는 학생도, 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교수도 모두 새롭다. 책도 새것이고, 노트도 볼펜도 새로 산 것이다. 강의실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의 따뜻함이 진하고, 창밖의 풍경에서 지난겨울의 황량함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봄에 보이는 흰 것들을 좋아했다. 봄에 피는 흰색은 벚꽃, 목련, 음 그리고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흰색의 생명체들. 꽃 이름은 그때도 잘 기억할 수 없었다. 나의 기억력이란 정말 어쩔 수 없다.
새롭고 수줍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첫 강의. 4학년 마지막 학기지만 여전히 처음에 대한 수줍음은 있었다.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호기심이 머리끝, 발끝까지 대롱대롱 달렸다.
그때 그를 처음 보았다. 한눈에 알 수 있는 앳된 모습. 상큼한 빨간색 스트라이프 티셔츠.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당돌함. 저 아이는 어떻게 이 수업까지 오게 됐을까. 눈에 그에 대한 호기심이 달렸다.
그러나 그것 외에도 궁금한 건 너무 많았고, 봄이 너무 즐거웠기 때문에 한 주간 그의 존재는 까맣게 잊었다.
두 번째 수업에서 다시 그를 보았다. 누가 봐도 신입생인 것을 알 수 있는 풋풋함을 흘리고 다녔지만, 여전히 묘하게 당돌했다.
‘요 녀석 봐라, 영어 좀 하는 모양이지.’
나는 영어를 좋아했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을 좋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열심히 공부했다. 좋아한다고 해서 다 잘하는 건 아니었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그리고 내 경험에 비춰 봤을 때 교양 수업으로 ‘중급 영어’를 선택하는 신입생은 드물었다. 이건 누가 뭐래도 취(업)준(비)생에 어울리는 수업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그에게 또다시 호기심이 생겼다. 호기심은 관심과 연결되는 것이라는 건 인정하기 싫었다.
나는 붙임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반대에 더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던 엉뚱한 용기가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저 수업 과제로 좀 여쭤볼 게 있을지도 몰라서 그러는데 핸드폰 번호 좀 알려주세요.”
“네?......”
가까이서 보니 좋았다. 말까지 걸어 보니 더 좋았다.
‘유영아, 말이 되는 걸 말해라, 이건 누가 봐도 먼저 꼬시는 거잖아......’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번호도 잘 알려주는.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책이 많은 곳은 안심이 되었다.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나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도서관 일은 단순한 것이었다. 책에 붙은 번호를 확인해서 순번대로 꽂아 놓으면 되는 일이다.
왼손에 분류를 마쳐야 할 책 중 한 권이 계속 들려있다. 10분째다, 아니 15분. 오른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에 온몸의 신경이란 신경이, 세포란 세포가 집중하고 있어 왼쪽 손의 일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집이 같은 방향이니 금요일에 학교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서 같이 가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만나자 했다. 같이 서울 가는 기차를 타고 싶었다. 문자를 보내고 한 시간이 넘어서야 답장을 받았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게 고마운지, 알겠다고 말해 준 게 고마운지, 어쨌든 고마웠다.
매일 도서관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그가 찾아왔다. 하얀색 트레이닝 바지 속엔 항상 뜨거운 캔 커피가 두 개 들어있었다. 뜨겁게 해서 주고 싶어 냄비 속에 넣고 끓여 왔다고 나중에 들었다. 냄비는 있는데 가스레인지가 없어 휴대용 버너를 샀다는 것은 시간이 한참 더 지난 후에 알았다.
어쨌든 나는 봄밤에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따뜻한 캔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어둠이 구석구석 공평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밤도 예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예뻤다. 내리막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나오는 버스 정류장은 둘이 걸을 땐 코 앞인 듯 짧았다.
그렇다, 나는 분명 그런 짓을 했었다. 내 쪽에서 먼저 관심이 생겨서 시작해 놓고는, 결국 상대방이 사귀자고 말하게 만들어 내는. 어쩌면 뻔한 수작 다 알고 있는데 그냥 먼저 만나자고 해 준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다.
학교에서 그는 신입생답게 어리숙했고 나는 취준생답게 노련했지만, 우린 둘 다 똑같이 가난했고 내세울 건 젊음과 사랑밖에 없었다.
사람을 그렇게 지치지 않고 바라만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1분 1초가 숨 막히게 떨렸다. 이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구나, 따스한 눈빛, 열정적이고 성실한 눈빛, 세상에 다시없을 최고의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사람의 눈을, 코를, 입술을, 그리고 얼굴 전체를 절실하게 바라보았다. 질리지도 않은 채.
“유영아 손 좀 이리 줘봐.”
“왜”
“여기다 좀 대봐.”
“왜, 뭔데.”
“나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나 너 너무 좋아하나 봐.”
봄은, 한 가지 딱 안 좋은 게 있었다.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눈 주변이 간지러워 고통스러워했다. 꽃가루들은 풀풀 잘도 날아다니는데 나는 대신 아파줄 수도 없어 안타까웠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어떤 기분이냐면, 눈알을 하나씩 빼서 물로 깨끗하게 씻고 싶어, 그런 기분이야.”
“으응, 휴우.”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숨이 턱턱 막히는 그의 원룸은 선풍기 하나 없었다. 그래도 둘이서 붙어 앉아 들어야 할 음악이, 봐야 할 영화가 너무 많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끝도 없이 듣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수도 없이 돌려 보며 “아, 그래도 이건 너무 하네.”하고 헥헥거리면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냉동실에 얼려놓은 싸구려 주스 팩을 물어 날랐다. 아니면 물에 흠뻑 적신 수건을 머리 위에 올려놓거나. 머리 위로 ‘파시시’ 하면서 뜨거운
김이 오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물에 적신 수건도 뜨겁게 변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에게서 희미한 땀 냄새가 났지만 떨어지기 싫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네가 불 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이사야」 4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