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살Ⅱ _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by 피츠로이 Fitzroy

헤어진 게 믿기지 않아서 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찾아간 날들이 많았다. 그가 가족과 살던 집 앞, 그가 혼자 살았던 학교 뒤 자취집, 그가 아르바이트하던 곳의 건물. 서울과 수원과 조치원을 누볐다.

그와 헤어지느니 차라리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는 게 낫다고, 그렇게 삶을 버리고 싶었던 밤도 있었다. 300일 남짓 만난 연인 때문에 24년간 살아온 삶도 버릴 수 있겠구나, 사랑이 이렇게 무섭구나 생각했다.

둘이 함께 봄과 여름을 지내고, 가을에 멀어진 후 추운 겨울에 우린 헤어졌다. 내가 먼저 졸업을 하고, 그는 학교에 남았다. 나는 변했는데, 그는 변하지 않아서 우린 헤어졌다. 잘 못 한 건 난데, 큰소리치는 쪽도 나여서 우린 헤어졌다.

가을엔 바빴다. 나는 취업을 했고 첫 직장에서 상사에게 혼나며 일을 배우느라 바빴고, 그는 혼자 남겨진 외로움과 싸우느라 바빴을 것이다. 나에게 투정을 하고 또 투정을 하다 어느 날은 포기하는 법도 배웠을 것이다. 나는 서서히 돈과 직업과 능력과 외모로 남자를 저울질하는 법을 배웠고, 나만 바라보고 있는 가난한 학생인 그에게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유영아, 오늘은 네가 살래? 나 돈 없는데.”

“......”

겨울은 우울한 날씨가 끊임없이 계속됐다. 금방이라도 눈이 올 듯 무거운 하늘이 계속 머리 위에 있었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두꺼운 옷을 꺼냈다.

나는 일을 핑계로 그를 매몰차게 대했다. 바쁘니까 이해하라 했고, 일하는 데 방해되니까 연락도 참으라 했다. 투정 같은 건 한 번도 받아주지 못하다가, 그가 마지막으로 건 서른 통의 전화도 결국 한 번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나에게서 영원히 돌아섰다.

어떻게 이별이 이렇게 쉬울 수 있지.

내 잘못을 깨닫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그 없이 살 수 있나. 나는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지금 내가 사과하면 그가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사과할 기회를 주기는커녕 나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연락이 닿지 않는 그를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 무작정 기다리는 날들이 시작됐다.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단서도 없이, 폭력적으로, 곳곳에서, 그렇게 그를 기다렸다. 밤낮없이.

놀이터에서 기다린 날은 편지를 써왔다. 세 장에 걸쳐 쓴 긴 편지였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사람이고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상세히 적었다. 나는 네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나쁜 인간이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너도 알지 않냐고, 나는 네가 좋다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삐걱거리는 그네에 앉아 노을이 짙어지는 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늘도 그를 만날 수 없겠구나 확신이 들었다. 그네에서 내려 쭈그리고 앉아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그네 앞은 전부 모래였다. 구멍을 판 자리에 편지를 넣고 그 위를 다시 흙으로 덮었다. 그가 어떻게든 이 편지를 봤으면 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이 편지를 읽게 하고 싶었다.

-지한아, 내가 놀이터 그네 옆에다 편지를 묻어 두고 왔어. 네가 꼭 읽어줬으면 좋겠어. 편지가 없어지기 전에 네가 찾아주면 좋겠어

문자에 여전히 답은 없었지만, 이틀 후 다시 찾은 놀이터에서 편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무작정 그를 기다렸던 많은 날 중 단 한 번, 기적처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차가웠다. 만져 보지 않아도 얼음장처럼 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더 이상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키 큰 나무 몇 그루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 우린 나란히 앉았지만, 그의 마음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멀리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말보로’ 담배를 주제로 그와 같이 들었던 중급영어 수업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었다.

“나 담배도 피운다.”

“그만하자.”

그에게 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의 확실한 이별 통보였다.

괜찮아질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오랜 시간을 아파할 것이라고.

버스 정류장에서 가기 싫다고 안아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내 신발 끈 풀어졌다고 철퍼덕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신발 끈을 묶어주던 기억도 생각났다. 어린 꼬마들만 보면 가방 속에 숨겨 두었던 춥파춥스를 짠하고 꺼내서 “선물이야.”라며 건네주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모습도 지나갔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생각한 건 그거였다. 기다려 보겠다고. 평생도 기다리겠다고. 내게 올지 안 올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라도 기다려 보겠다고.

그러나,

잊기 싫었던 것들이 잊혔다.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냥 잊었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먼 후일」 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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