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에 그런 책을 읽었다. 맨 앞장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싶니?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다면 여행을 하지 마라
그래서 나에게 물었다.
“유영아 넌 무엇을 하고 싶니?”
“.......”
“그래, 대답을 못 하는구나, (어쩔 수 없이) 여행을 가자.”
회사 업무로 태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이 울었다. 5월이었고, 5월은 늘 그렇듯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나는 태국 출장을 벌써 몇 번이고 다녀오는데 외국 한 번 못 나가 본 엄마 생각에 속이 상했다. 어렸을 적, 엄마는 비행기가 참 빨리 뜬다고 말했었다.
“유영아, 저거 봐. 저기 이제 비행기 뜨려고 한다. 저기 봐, 저기 봐! 어머, 떴다! 어쩜 저렇게 큰 비행기가 금세 뜨니......”
하늘로 솟는 비행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엄마는 국내선 비행기밖에 타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이렇게 잘도 우리나라 밖을 빠져나간다. 엄마가 말했던 그렇게 금방 뜨는 비행기를 타고.
이젠 돈도 벌고 해외여행도 시켜줄 수 있는데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괴로움을 꾸역꾸역 삼켜가며 창가에 매달려 흘러가는 구름 떼를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런 결심이 섰다.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지금의 나에겐 마음을 튼튼하게 할 여행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나는 교회도 절에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렸을 적부터 위기가 찾아오면 하느님에게도, 부처님에게도 기도를 했다. 기도를 통해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었다. 교회에서, 성당에서, 그리고 사찰에서 느껴지는 고요함과 경건함이 좋았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도 아름답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도 예뻤다. 겨울 산사에 눈이 소복소복 마당에 내려앉으면, 스님이 나와 나무 비로 쓰윽 쓰윽 눈을 쓸어 낼 때 나던 상큼한 소리를 좋아했다.
신들의 나라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란 사람에 대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엄마의 죽음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기엔 그런 장소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신에게 위로받고, 깨달음을 얻어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결국 여러 나라 중에 인도를 골랐다. 류시화 작가의 책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팀장님은 나의 퇴사 이야기에 많이 놀란듯했다. 나는
한 달 정도 길게 배낭여행을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게 퇴사 이유인가요?”
“네.”
“꼭 지금 가셔야 하나요?”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 갈지도 모르잖아요.”
“여행 다녀와서 뭐 할 거예요?”
“흐흐흐 그러게요, 뭐하죠?”
그렇게 나는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첫 직장을 떠났다. 남들은 돈 안 줘도 되니 일만 시켜 달라는 선망의 직장이었다. 팀장님은 내 퇴사 소식을 듣기 며칠 전, 공항 면세점에서 내 생일 선물을 산 모양이었다. 틀림없이 좋아하겠지 하며 골랐다던 G-SHOCK의 민트색 손목시계. 졸지에 퇴사 선물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빠에게 어렵게 퇴사 이야기를 꺼냈는데 반대를 했다. 구체적인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무작정 그만두겠다 하니 당연한 대답일 수도 있는데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얼버무리고 며칠간 아빠를 만나지 못했다. 아침 출근길에 세탁기 안에 다 돌아간 빨래 좀 널어달라고 아빠에게 짤막한 쪽지를 남겼다. 덧붙여 내 뜻대로 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죄송하다고 썼다. 그렇지만 응원해 달라고 아직도 잘한 것인지 불안하다고 했다. 회사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장문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힘든 결정 존중해,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새털같이 많은 시간 잠깐 쉬어가도 좋겠지. 옛날엔 과거 보러 경상도에서 한양까지 몇 날 며칠을 걸어 다녔어. 늦었다고 깨달은 순간이 가장 빠른 시간이라 한단다. 자성과 재충전을 위한 시간이 더 높은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되길 바라. 우리 딸 자랑스러워! 최고야! 파이팅!! 사랑해 하늘땅만큼
공항을 막 빠져나왔을 때 처음 맞이한 본 공포스러운 풍경에 난 왜 여기에 오겠다고 했나, 이 여행을 잠깐 후회했다.
책이나 인터넷에는 인도 여행 가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던데 내가 탄 뉴델리행 JAL 비행기 안에는 겨우 10명이나 될까 말까 한 사람들이 뚝뚝 떨어져 앉아있었다. 10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난 다른 승객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어두운 통로에서 갑자기 걸어 들어온 승무원에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외로운 비행을 마치고 밤이 깊은 시간에 뉴델리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나를 맞이 한 건 칠흑 같은 어둠과(도시에 불빛이 너무 없어 당황했다) 그 어둠 속에서 빛나던 수많은 흰자위였다. 호객을 나온 그들은 모두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어둠 속에 폭 숨겨져 있었고, 반
대로 너무 하얘서 섬뜩한 눈들이 오직 나 하나만을 쫓고 있었다. 눈알이 오십 개 아니 백 개도 있는 것 같았다. 호기심을 흘리는 수많은 눈빛을 견디는 건 쉽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최대한 힘을 주고 한 곳 만을 응시하며 똑바로 걸었다. 넘어지지 않도록 애쓰며.
‘혼자서 한 달 잘 버틸 수 있을까......’ 한껏 솟아있던 어깨가 자꾸 움츠러들었다.
인도에 도착한 둘째 날, (말도 안 되게) 한국인을 만나 (너무나) 안심하고 말았다. 한국말을 하는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었다. 신이 도왔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여유가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정말 맛있는 '짜이'를 파는 곳을 알고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내가 생각했던 ‘음료를 파는 가게’가 아니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의심되는 1평도 안 되는 쓰러져 가는 공간에서 눈이 흐릿한 할아버지가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노상에 앉아 풀풀 날아다니는 먼지를 흡입하던 우리 앞에 짜이 두 잔이 놓였지만 나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하얀 찻잔에 덕지덕지 붙은 때와 차를 끓이던 주전자의 불결함이 이건 절대로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이 뉴델리에서 가장 맛있는 짜이 파는 데 예요.”
마시진 못하고 보고만 있었던 첫 짜이를 만난 후, 그 후로 한 달을 인도에서 지내며, 결국 나는 짜이의 열렬한 팬이 되고 말았다. 늘 지저분한 주전자에 끓여져 때 묻은 컵에 담겨 나왔지만 한국의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짜이 맛 음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묵직함이 있었다. 짜이는 가장 저렴하고, 어디서나 마실 수 있고, 인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시는 그런 음료였다.
타지마할 밖에 볼 게 없었던 도시 ‘아그라’에서 정신이 잠깐 나갔다 돌아올 만큼 강렬한 짜이를 만났다. 행복감에 젖어 이건 대체 뭐지, 하고 헤롱 거리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스페니쉬 커플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키스를 끝낸 여자 쪽이 이건 정말 끝내주는 짜이라며 나를 향해 말하고 이내 늙은 주인에게 “한잔 더!”를 외쳤다. 다음날 그 짜이를 마시러 다시 가게에 들렀으나 이른 아침 장사는 게으른 할아버지에게 무리였던 모양이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계획대로 아그라를 떠났다.
‘마날리’에서도 근사한 짜이를 만났다. 히말라야에서 오랫동안 수행을 하다가 그곳에서 들여온 물건으로 마날리에 상점을 차린 아저씨가 만들어준 짜이가 그랬다. 정성에 정성을 더한 작품 같았다. 눈앞에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짜이를 만드는 과정이 펼쳐졌다. 맛있는 짜이를 만들려면 우유와 설탕을 어느 정도 넣어야 하는지, 또 차는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정성 어린 대접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가는 가난한 여행자의 가벼운 주머니가 죄스럽게 느껴졌다.
20시간 이상 타고 가야 하는 3등석 기차는, 공간은 좁고 사람은 많고 다리는 붓고, 먹을 것이라곤 비스킷 몇 조각밖에 없는 그런 열악한 조건이다. 울고 싶은 그런 상황에서 기차 안에서 꼬마 아이가 파는 짜이를 마셨는데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생각했다. 기차에서 파는 짜이는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약을 타서 준 후 물건을 훔쳐 간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던 터라 꼬마에게 짜이를 주문까지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내게 그런 불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버젓한 회사 그만두고 뭐하러 이 고생스러운 여행을 왔나 슬퍼졌던 마음이 금세 사라질 만큼 멋진 짜이였다. 짜이가 전해주는, 온몸으로 번지는 그 뜨끈함이 나를 오랫동안 위로했다.
그리고 니콜라가 있었다. 니콜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엄마와 선생님과 친구를 합쳐 놓은 뭔가 설명하기 힘든 묵직한 존재감이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어디를 가야 할지,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어떤 옷을 사야 할지, 자기 전에 명상을 어떻게 하는지, 죽음이 왜 무섭지 않은지 가르쳐 주었다. 그녀 덕분에 한국말로 적혀 있는데도 이해가 안 가는 철학책을 읽게 되었고, 빈티지 패션에 눈을 떴고, 추근대는 인도 남자들에게 “꺼져.”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호주에 가서 꼭 살아보고, 요가 학원에 다니기로 약속했다. 그녀의 말처럼 어렴풋이 죽는 게 두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는 불공평한 관계였다. 내 쪽에선 주는 것 없이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받고만 있는 관계.
여행을 하면서 여러 곳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쳤지만 ‘자이살메르’란 도시에서 본격적으로 함께했다. 여행자들은 그렇게 만나고 만다, 어떤 약속도 없이. 2박 3일 내내 하루 종일 사막에서 낙타를 타다가, 밤이 되면 침낭 하나 깔고 쏟아지는 별을 보며 잠을 잤다. 삼일 내내 짜파티만 먹으면 썩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3일 동안 그녀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How are you?”와 “Are you okay?”였다. 낙타를 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침낭을 깔다가도 그 질문을 들었다. 어느 날은 1시간에 한 번씩 물어보길래, 내가 뭐 잘못했나? 내가 어디 아파 보이나? 내가 어디 이상한가? 왜 자꾸 괜찮냐 어떠냐 물어보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시 저 영어 내가 알고 있는 뜻이랑 다른 거 아니야?’ 지경까지 갔다.
니콜라는 매 순간 날 배려하며 기분은 어떤지, 불편한 데는 없는지 확인했다. 나는 그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자주 난처해
졌다. 이러한 연유로 니콜라가 엄마 같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주 말했다. 이 여행이 끝나도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독일에 살고, 나는 한국에 산다. 정말 우리가 언젠가, 어느 장소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유럽과 아시아라는 물리적 거리를 뚫고. 처음엔 의심했는데 점점 그 말을 믿고 싶어 졌다.
12시간째 연착 중인 아그라행 기차를 기다리다 니콜라와 처음 만났다. 나는 한눈에 그녀가 마음에 들어 먼저 말을 걸었다. ‘Hi!’ 대신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후진 기차를 말도 안 되는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무식하게 큰 배낭을 플랫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배낭을 베개 삼아 드러 누었다. 그렇게 누워, 기차를 기다리는 세계 곳곳에서 온 많은 배낭 여행자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자니, 내가 이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게 묘하게 기뻐졌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내 피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여행 시작 후 이미 많이 그을린 내 피부를 보며 아시아인들의 피부색이 너무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녀의 칭찬은 기분 좋았다.
그녀와 헤어지던 날,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에도 첫 만남 때처럼 다짜고짜 칭찬을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웃는 게 참 예쁘다고 혹은 너는 밥을 참 맛있게 먹는다고.
갠지스강이 흐르는 도시, ‘바라나시’를 떠나는 날, 나는 울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제멋대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니 나 지금 왜 울고 있는 거지.’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단지 죽기 전에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생각한 것뿐인데, 매일 내게 엽서를 사라고 강요하던 꼬마는 이제 누구한테 엽서를 파나 생각한 것뿐인데, 갑자기 미친 듯이 서러워졌다.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열심히 또 걸어야 하는데 이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갠지스강에서 열렸던 뿌자 의식을 보면서, 화장터에서 시신이 태워지는 광경을 보면서, 절대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는 강물로 신성하게 몸을 닦는 인도 사람들을 보면서, 이곳에 와서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신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착각이어도 좋지만, 바라나시에 있는 내내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 도시가 내게 삶과 죽음이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 아니라, 삶과 너무나 가까운 곳에 항상 죽음이 같이 있는 것이니, 그러니까 무서워할 게 없다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위로받고 있구나, 머무는 내내 그런 기분이 들었다.
26살에 엄마 생각을 하다 죽는 게 무서워서 인도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국에 돌아오니 그들로부터 여러 메일이 와있었다.
‘유영, 죽는 상상을 하는 거야. 어떻게 죽고 싶어? 여러 가지 상황이 있겠지. 나이는 언제쯤? 자다가 죽을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죽을 수도 있겠고. 중요한 건 이거야. 죽는 때의 이미지를 만드는 거야. 아름답고 행복하게 죽는 걸 상상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을 그 이미지에 추가하는 거야. 그리고 매일 생각해. 그럼 더 이상 죽는 게 무섭지 않을 거야.’
-리엄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난, 또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짜릿하고 흥분돼.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죽고 다시 태어나고 무서울 게 없어. 영원한 인생이 되는 거니까. 문제가 뭐야, 왜 죽는 게 두려워 유영?’
-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