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짜리 적금을 드는 이유

by 피츠로이 Fitzroy

난 명품이라 불리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게 없다. 내가 명품을 만져 본 건 돈 많은 남자 친구를 만나던 때가 전부다. 그가 가진 루이뷔통, 구찌, 고야드 가방 같은 것들을 같이 맸었다. 아, 한 번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데님 셔츠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 셔츠는 자그마치 지난달까지 우리 집에 있었는데, 손바닥 크기로 잘게 잘게 잘라서 자동차 바퀴 닦을 때 잘 썼다.
그래서 내가 명품에 관심이 없어서 안 가지고 있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명품이 있다면 잘 가지고 다녔을 것 같다. 은근히 뽐내며.

2020년, 나는 너무 비장한데 남이 보면 코웃음 치거나 비웃을만한 계획을 하나 세웠다.
나는 1월부터 15만 원씩 4년을 모을 예정이다. 15만 원씩 4년 모으면 720만 원이 된다. 그럼 샤넬의 클래식 플립 백을 하나 사겠다. 30만 원쯤 더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정확히 2024년 1월에 그 가방을 가질 수 있다. 42살이다, 그땐. 무려 앞자리 수가 바뀌어 있는 것이다.
남들은 부모가 떡 하고 사주기도 하고 남편이 짠 하고 선물로 주기도 하는데, 나는 4년을 꼬박 모아서 사야 한다는 게 너무 없어 보여 짜증 나지만 그래도 샤넬 백을 결제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이 짜증 정도는 참을 수 있다. 내 인생에 명품이라 하면 그거 딱 하나면 된다.
4년 돈 모아서 백 사면 너무 행복해서 잠 잘 때도 안고서 어깨춤을 출지 모른다. 정작 밖에 나갈 때는 아까워서 못 가지고 나갈지도 모르고.
딸한테도 물려줘봐? 하고 김칫국을 마시고 있지만 물건을 워낙 험하게 쓰는 나에겐 어려운 일일 듯하다.

스무 살 때 수원역 지하상가에서 셔츠 한 장을 샀었다. 나는 잘 입고 다녔는데 주변 몇 사람이 그 셔츠를 볼 때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주저하는 표정을 짓길래 이상하다 했다. 루이뷔통 로고가 거꾸로 찍힌 짝퉁 셔츠를 입고 다녀도 그게 루이뷔통을 카피한 제품인지조차 몰랐다. 그러니 당연히 창피한지도 모르고 입고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의 팀장님은 이제 사회초년생인데 명품 백 하나쯤 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었다. 그때 나는 돈이 없어서 한 여름에 회사 옥상에서 직사광선을 맞으면 컵라면을 먹었다. 나도 점심에 8천 원짜리 냉면이 먹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 계획이 얼마나 멋진 계획인지 알겠죠?

(사진은 직원들 주려고 산 립스틱. 나는 로드샵꺼 써도 된다 자기 주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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