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사 있는 노래는 안 들어

by 피츠로이 Fitzroy

나는 전반적으로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아이였다.
내가 좋은지 안 좋은 지는 안 중요했고 남이 좋아할 것 같은 게 중요했다.
그래서 우유부단했고 선택 장애가 있었고 남들 눈치를 보면서 말하다 보니 흐리멍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중 자신의 취향을 똑 부러지게 말하는 아이들이 몇몇 있었는데 나는 그 친구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부러워했었다.

중학교 같은 반 아이였던 선아는 음악은 앙드레 가뇽만 들었다. 우리 반에 클래식 음악을 듣는 아이는 그 아이가 유일했다. 우리는 그때 에쵸티파와 젝키파로 갈라져 서로 욕하고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는데 말이다.
선아가 “나는 가사 있는 노래는 안 들어.”라며 CD플레이어에 앙드레 가뇽을 꽂는데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에쵸티 노래보다 MAX나 NOW가 좋다는 말은 못 하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도 멋진 애가 있었다. 연주는 키가 참 컸는데 편식을 했다. 편식해도 키가 큰 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본이었다.
“나는 도시락 반찬으로 햄만 먹어.”라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좀 충격이었다. 햄 이외의 것은 일체 먹지 않는다니. 그리고 도시락 같이 먹을 아이를 반찬에 햄이 있는 아이로만 골랐다.
“아름이 너는 햄 반찬이 없으니까 오늘 같이 못 먹어. 오늘 나는 특별히 맛있는 햄을 싸왔거든.”
같이 도시락을 못 먹어서 슬펐지만 얜 또 왜 이렇게 멋있는 건가 생각했다.

내 취향에 자신감을 갖는 건 특별한 능력은 아닐 텐데 난 그 자질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이틀 쉬면서 오래된 드라마 ‘밀회’를 몰아보다가 앙드레 가뇽을 좋아하던 선아가 생각났다. 밑도 끝도 없이 문득.
선아야 넌 아직도 앙드레 가뇽을 좋아하니? 나도 가사 없는 음악들 좀 많이 들어볼게. 드라마 보다보니까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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