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스피
지난 글에서 성인 아스퍼거 증후군,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진단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오늘은 그 진단을 더욱 어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진단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스피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이미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가정까지 이룬 아스피들의 경우 대부분은 본인의 아스피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한 연구 자체가 80년대에 이루어졌고, 대중적으로 알려져 각광을 받게 된 것은 90년대 이후의 일인데다가 독일에서 시작된 연구가 미국에서 조명을 받고, 국내에 그 개념이 알려지게 된 역사를 생각한다면 사실상 국내에서는 밀레니엄 시대 이후에야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된 개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30-40대인 성인 아스피들은 아스퍼거 증후군 혹은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 성장기를 보낸 것입니다.
고기능 자폐는 마음 이론의 부재, 결핍, 미발달이라는 부분을 제외하면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발달의 문제가 크게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적 능력에서는 남들보다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개념도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즉, 아스퍼거 증후군을 성장기에 진단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공부만 잘하면 사회성이 조금 떨어지거나 미숙한 것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국내 정서상, 공부는 잘하지만 말수가 적거나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라고 해서 발달 장애를 의심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니까요.
실제로 누가 봐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 중증 자폐 증상을 보이는 경우와 아스퍼거 증후군은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중증 자폐가 있는 정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환의 모는 우영우 변호사에게 같은 장애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 다르다면서 자신의 아들과 비교할 때 놀라운 성취를 이루고 변호사로 당당히 세상을 살아가는 영우를 보며 느끼는 복잡한 심경을 털어 놓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학습 능력에 큰 문제가 없거나 뛰어난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부족한 사회성을 학습을 통해 커버하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학습이 진행 중이고 미성숙한 면도 있기 때문에 요즘처럼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개념이 잘 알려져 있고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고기능 자폐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학습을 통한 사회화(실질적인 사회화라기 보다는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워 따라 함으로써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가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는 나이가 들 수록 더 많이 갖춰지기 때문에 성인을 진단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며, 현재 성인 아스피들은 이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은 환경에서 자라 왔으니 더 알기 어려웠겠지요.
게다가 결혼해서 가정까지 이루고 있는 아스피라면 어느 정도 이런 사회화가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배우자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닌 직장 동료나 학교 친구들처럼 적당한 인간 관계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스피 본인이 스스로 자신이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 경우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자녀에게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이 먼저 내려지고 (유전적인 영향으로 자폐 스펙트럼은 자녀에게 유전될 확률이 있습니다) 나중에 아빠의 아스퍼거 증후군이 의심되어 진단을 받게 된다거나, 배우자가 관계에 문제를 느끼고 알아보던 과정에서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을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인에게 자폐라는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고, 본인 스스로는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아스피가 의심되는 (진단 받기 전) 남편 (아스피 인구가 남성이 많다고 알려져 있고, 아스피 남편에 대한 사례가 많으므로 여기에서는 편의상 남편으로 서술하겠습니다.) 은 부인이 아스퍼거 증후군,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진단을 권유해도 이를 원치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이 조금 특이하거나 다르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을 경우도 있을테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남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잘 살아 왔는데 갑자기 본인에게 '자폐'라는 낙인을 찍는 것에 큰 거부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 진단의 유무가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자기 중심성'이 큰 특성인 자폐 성향을 가진 아스피들은 자신에게 실익이 없거나 납득이 되지 않으면 동기부여가 어렵습니다. 이런 면이 배우자 입장에서는 '이기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인데, 자폐 성향을 이해하고 나면 덜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스피 본인은 정형인보다 친밀한 인간 관계에 대한 욕구가 적기 때문에 부인은 외롭고 단절 되었다고 느껴도 현재 관계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현재만을 살아가는 아스피의 특성상, 당장 실익이 없는 것 같은데 미래의 부부 관계를 위해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아스피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도 않는데 이걸 진단 받는다고 악화된 부부 관계가 좋아질 것 같지도 않고, 그걸 진단 받는 순간 낙인 찍히는 사람은 본인이라 내키지 않는 것이지요. 게다가 진단 비용도 만만치 않아 그 비용을 지출할만한 실익이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큽니다.
위의 모든 내용들은 제가 처음 남편에게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권유했을 때에 남편이 진단을 원치 않은 이유라며 제게 말했던 내용들입니다. 그렇게 실익이 없다는 판단을 한 번 내리게 되면 아스피의 고집을 꺾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단순히 실익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공격한다거나,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것으로 받아 들여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반응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더 소통이 어려울 수 있겠지요.
제 경우에도 이런 부분들이 진단을 받는 데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호주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아시안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남편은 우선 '자폐 스펙트럼'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있었습니다. '발달 장애'라는 부정적인 프레임을 본인에게 씌우려고 한다는 것에 엄청난 거부 반응을 보였었죠. 말이 적은 편이긴 했지만 학교 생활 내내 아무 문제 없이 성장했고 저와 결혼하기 전에 장기간의 연애도 했었는데 이렇게 지적하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다는 말도 했습니다. 심지어 주변 친구들이나 가족들조차 제 남편이 자폐 스펙트럼일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죠. 서로 잘 아는 남편의 고등학교 친구에게 제 고민을 털어 놓자 그 친구는 오히려 그럴 리가 없는데 네가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며 남편에게 왜 그런 부정적인 낙인을 찍으려 하느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이 주제에 대해서 남편에게 매끄럽게 전달하지 못했던 제 탓도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때를 되돌아 보면 소통이 어려웠던 결혼 생활 내내 풀지 못한 감정의 실타래가 마음 속에 얽혀 있어 괴로웠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이라는 점이 밝혀졌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 모든 상황과 어려움이 남편의 잘못 때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추궁하듯 남편을 몰아 붙였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원인들이 남편에게 두 가지 마음이 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첫째, 나는 자폐 스펙트럼이 아닐 것이다. 둘째, 만약 맞더라도 내가 얻는 것이 없는 데 왜 진단을 받아야 하나? 이 부분을 해결하고 남편이 실제로 진단을 받게 되기 까지는 2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과정은 단지 남편의 마음을 바꾸는 것 뿐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본인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만큼이나, 제게도 새로운 개념을 학습하고 관계를 새롭게 보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저와 너무나 다른 남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남편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저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고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남편 모두에게 이 시간들은 이미 거쳤어야 할 성장기의 미뤄 두어 눈덩이처럼 불어난 숙제들을 대면해야 하는 시간이었죠.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이 의심되지만 남편의 거부, 부인, 진단 기피 등으로 더 답답한 마음이 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어느 정도는 당연한 반응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피 본인과 정형인 배우자 모두에게 행복한 관계를 위해 필요한(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어요) 진단을 받기 위해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마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제 생각에 뉴로 다이버스 커플이 함께 행복한 공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뉴로 다이버시티를 받아 들이고 그 기반으로 새롭게 관계를 정립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설득하여 진단을 받게 하고, 그 과정에서 제가 겪었던 심경 변화에 대한 내용들은 추후 글들에서 더 나눠보도록 할게요.